친구의 슬픔을 나눈다

개인적 사유와 공감의 이유

by 질그릇

한 친구가 반려견 장례식장에 다녀 오는 길에 문자를 보내 왔다. 자신을 제일 많이 따르던 막내아이가 꿈나라로 갔다고. 마음이 아프고, 세상 허무하다고. 원래 반려견에 대한 정이 깊은 친구라 그 아픈 마음이 전해 졌다. 아마도 지금 많이 아플 것이다. 떠난 아이의 빈 자리가 클 것이다. 나는 그 친구의 슬픔에 제대로 회신을 할 수 없었다.




우리집에도 13살 깜이가 있다. 사람 나이로 치면, 70에 가까운 나이다. 여기저기 아프고, 입도 더 짧아지고, 모든게 귀찮은 듯 벽 보고 누워있는 시간이 길다. 그래도 내가 퇴근하면 우렁차게 짖어 주는 건 여전하다. 내 얼굴을 들이 밀라고 야단치면, 내가 뺨을 갖다 대고, 마구 핥아 준다. 입냄새에 끈적임이 뺨을 충분히 적시는 것으로 나는 퇴근 보고를 마친다.


우리집은 깜이를 키우고자 해서 키우게 된 것이 아니다. 조카가 입양을 했다가 못키우겠다고 해서 정말 얼떨결에 키우게 됐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된 반려견과의 시작과 지금까지의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반려견을 키운다고 하면, 자녀 낳을 계획을 세우는 것 만큼 신중하라고 조언해 준다. 그 깜이가 이제는 70세 할아버지가 됐다. 앞으로 남은 몇 년을 어떻게 해줄 것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깜이의 죽음에 대해서 얘기를 나눈다.


우리집의 어려움을 아는 사람들은 깜이가 없으면 속시원할 거라고 얘기한다. 정말 그럴까? 13년을 함께 살아온 우리집 둘째가 없으면 나는 정말 속시원할까? 깜이가 나를 바라보는 두 눈동자를 들여다 보면 알 수 있다. 우리 사이에 '공감'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공감을 통해 우리는 기쁨과 슬픔, 안도와 간절함을 서로 공유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즘 우리 사회는 공감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나눈다. 현대사회의 상처와 치유를 얘기하면서 공감이라는 단어를 빼놓을 수는 없다. 공감 부재의 시대에 어쩌면 나는 깜이를 통해서 공감의 조각을 배우고 있는 지도 모른다.




친구의 반려견 코리가 무지개 다리를 건너고 3일 째인 지금도 친구는 그 빈자리를 보면서 슬퍼하고 있을 것이다. 나를 따르고, 나의 감정을 살펴 주고, 자신의 감정을 온 몸으로 표현했던 아이가 그 자리에 없다는 것은 당분간 친구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다. 갑자기 아프고, 갑자기 떠나게 되어서 더 그럴 것이다. 또한 코리와 함께 했던 행복한 시간들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더 잘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도 함께.. 깨어 있는 것들은 언젠가 잠에 든다. 그것을 거스를 수는 없다. 다만, 남은 자는 슬퍼하고 기억하는 것으로 자신의 몫을 한다.


이번 일을 통해 친구는 자신의 죽음도 생각했다. 자신이 죽었을 때, 진심으로 슬퍼해 주고, 함께 행복했던 시간을 기억해 줄 좋은 사람들에게 더 잘해야겠다고. 코리는 이렇게 내 친구에게 두꺼운 철학책 수십권의 가르침을 주고 떠났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직접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전화기를 들고 나의 죽음을 슬픔으로, 그리고 기억으로 남겨줄 사람들에게 짧은 안부라도 전해 보자.



'잘 자, 코리야. 내 친구에게 좋은 기억을 많이 남겨줘서 정말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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