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말씀에 매이다
11절 :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절 :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절 :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절: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의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
15절 :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한가? 듣는 즉시 없어지는가? 잠깐 기쁘다가 곧 사라지는가? 듣기는 했으되 인생의 괴로움과 걱정으로 말씀을 들은 기쁨을 덮고 사는가? 누구나 우리는 좋은 땅이고자 한다. 우리 모두는 그렇다.
그러나, 성경 말씀에 그 결실은 "인내로" 맺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반드시 들어야 한다. 주말에 만이라도 듣고 묵상하고 나눠야 한다. 그러나 듣고, 묵상하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하나님 말씀을 살아가는 동안 "인내함으로" 지켜내고 실천해 나가야 한다.
이 "인내함"은 참 어렵다. 믿음을 지켜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는 나를 유혹하고 넘어뜨리려는 것이 너무 많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믿음의 무리를 이룬다.
하지만, 소위 네트워크(인맥)나 이벤트, 소소한 얘기를 나누기 위한 것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전부터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계속 얘기해 온 것도 이런 면에서 적은 것이다. 예전에 만난 한 분의 말씀이 기억난다.
무신론자인 아내가 여집사님께 말했다.
"좋은 분을 만나서 좋아요. 언니 동생처럼 지내면 좋겠어요."
이에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고맙지만, 나는 하나님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좋은 언니가 아니라.."
그분의 말이 성경적으로 맞는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실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나의 믿음을 돌아보면서 종종 여집사님의 위 말을 기억해 낸다. 그리고 이렇게 연결한다. 좋은 사람을 만나러 교회에 가면, 반드시 사람에게 상처받고 교회를 떠나게 된다. 그러나 항상 한결같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교회에 가면,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된다. 교회는 목사님이나 장로, 집사님을 보고 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그렇지 않다. 이런 면에서 나는 이단의 길을 걷는다.
(어떻게 크리스찬이 그분을 모르냐는 의아스런 눈빛을 보내면서)
"어느 교회에 말씀을 훌륭하게 하시는 ㅇㅇㅇ 목사님 아시죠? 정말 훌륭한 분이세요."
하지만 나는 그분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