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아내지 못하는 탄식
처음 일러스트페어(2016)에 내보인 그림 중 하나다.
난 아직도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지금 다니는 미술학원 전에 성인미술학원을 다녔는데 그때 당시 선생님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난 선생님을 매우 존경했고 좋아했으며 어떻게 하면 선생님이 갖고 있는 생각을 나도 따라갈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 그만큼 미술에 관해서 매우 멋져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선생님의 모든 가르침을 내가 흡수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미술을 전공했으나, 짧은 기간 잠깐 맛보고 졸업한 나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이해 못 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선생님은 답답한 어투로 '... 모르겠으면 그냥 외우세요.'라고 마무리 짓기도 했다.
어느 날, 일러스트페어를 알게 되었는데 참여하려면 부스비용이 발생했다. 그것뿐이겠는가 내가 만들어내야 하는 제품 같은 것들을 생각해 봤을 때 돈이 꽤 필요했다.
백수인 나는 그 돈이 무겁고 부담스럽게 찾아왔고, 난 선생님에게 '일러스트페어라는 걸 알게 됐는데 돈이 없어서 못할 거 같다'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나에게 정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무슨 상관이냐, 돈은 벌면 되지 않냐, 뭐 좀 해봐라 제발 좀 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단순하게 빠르게 납득했다. 그래, 한번 해보자. 난 급하게 오전 알바를 구한 후 학원에서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그리고 난 그림을 뭘 그릴까 고민했다.
선생님은 마인드맵처럼 내 생각을 정리해 보라고 했다. 그렇게 마인드맵을 만드는데 다 쓰다 보니 모든 생각이 하나의 뿌리가 있고 생각과 상황이 돋아나 있었다.
그 당시 나는 내 질병에 거의 99.9% 정도 사로잡혀 있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증상이 더 심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맞는 약을 맞추는 기간이 필요했고, 그 기간은 나에게 많이 길었다. 그리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매일 절망하며 언제 생길지 모르는 증상들에 두려워하며 길을 걷고 사람을 만나고를 반복했다. 사람이 매일 절망하다 보면 어느샌가 나는 없고 절망만 남을 때가 있다.
다른 형태의 집착이 형성됐는데, 더욱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말씀에 예수님이 그렇게 낫는다고 해주시는데 나 하나쯤 거뜬히 낫게 해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선교를 가도, 수련회를 가도, 스트레스와 불규칙 수면에 증상은 피할 수 없었다. 교회행사에는 여유가 있지 않았고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스케줄로 수면이 부족한 날이 지속됨에 증상은 다시 나타났다.
난 증상이 나오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울고 싶었다.
선생님이 내 마인드맵을 보더니, 미소를 띠며 '노다지네'라고 표현했다. 선생님이 보기엔 내가 할 수 있는 그림 소재가 많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주제가 정해졌는데, 그건 내가 가장 피하고 싶은 질병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싫다고 했다.
왜 모르는 사람에게 내 질병을 떠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억울하게 말했다.
그는, 예상치 못한 말을 했는데,
'그래서 미술 아닌가요?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하는 걸 미술은 좋다고 하고,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걸 미술은 이상하다고 말하는 게 재밌지 않아요?'
그 말을 듣고서, 대학 때 내가 경험했던 분위기가 기억났다. 교회에선 내 생각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당했으나, 대학교에 가면 그 누구보다도 개성이 없던 게 '나'였다. 그런 곳에 나는 자유를 느꼈었다.
결국 제일 말하기 싫은 주제로 그림을 시작했다.
발작이라는 단어를 거부감 없이 솔직하게 선생님에게 꺼내는 과정에 질병에 대한 비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내 초안을 검토했고, '아 이건 망했다.'라고 생각한 것을 진행하자고 하셨다.
내가 가장 숨기고 싶은 것을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매일같이 누군가 나를 질타하는 거 같았고 질병에 잡혀있는 나에게 나약하다며 무시발언을 내뱉고 내 상처에 관심 없이 대하며 반대로 동정심 어린 눈으로 날 대할 불특정 다수 누군가들을 상상했다.
괴로움의 상상과 함께 그림을 그려갔다.
이상하게도, 질병을 드러내며 그릴 수록 내 질병은 마음에서 더 작아지고 있었다.
그저, 하나의 그림 소재가 될 뿐이었다.
이상하게 용기가 생겼고, 이상하게 자신감이 붙으며 그림을 그려갔다.
그렇게 첫 일러스트페어를 참여했고, 모르는 대다수에게 내 질병을 오픈하는 아이러니한 상황과 웃기게도 통쾌했던 시간이었다. 지난날 숨기려고 아득바득했던 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생각은 내가 만든 팸플릿에 고스란히 담겼다. 누구에게도 말을 못 했고 누구에게도 말하기 싫었던 내 안의 고민과 절망을 불특정 다수에게 오픈하는 건 짜릿하기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난 질병에서 자유해지는 경험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면에 자유해진건 아니었다.
약이 변경되고, 약 수치를 올리게 되면서 증상이 완화되어 회사도 다녔고 일상생활도 잘했지만,
어느 순간 다시 찾아오는 증상은
나를 다시 절망으로 데려갈 때가 많다.
현재 나는 임신 중이다.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은 말했다. ‘그 질환은 임신 중에 증상이 나타나면 아기한테도 좋지 않다. 그리고 호르몬 불균형으로 증상이 나와서 약을 올려야 할 수도 있다.’
내심 불안했던 생각이 현실이 되어 어김없이 다시 찾아왔다.
임신 이후 쭉 몸의 변화로 새벽에 잠을 못 자게 되면서 증상은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익숙하게 나는 다시 절망하며 원하지 않은 눈물을 흘렸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고 통제도 안되며 예방도 못하는 그런 증상.
타인이 어떻게 해줄 수 없는 이 질환은 오롯이 내 몫이다. 이 몫을 난 10년 넘게 해 왔으나 증상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난 그때도, 지금도,
옆에 누군가가 있다 해도
외로웠다.
내가 아무리 증상에 대해 설명하고 두려움을 설명해도, 조언할지언정 내 아픔을 가져가진 못한다. 이 현실이 날 외롭게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나를 탓해보다가 하나님을 탓했다가 날 이렇게 낳아주신 부모님을 탓하고를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거냐며 나를 또 괴롭힌다.
그래도,
절망에서 일어나는 회복 속도가 빨라진 것은 사실이다.
그것만으로도 절망감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이 효과를 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내 곁을 지나갔고 빨라진 시간을 만드는데 오래 걸렸다.
하나님을 믿지만, 아플 때마다 신에 대한 내 생각이 드러난다.
‘하나님은 내 지병은 안 고쳐주신다.’
이 생각을 하는 순간 무기력증이 더 깊어진다.
하나님의 생각과 때를 내가 어찌 알까.
어느 간사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가 너무 아픈 건, 하나님이 우릴 부르시는 거야. 그러니 더 기도하며 가까이 가자.’
지병이 완치가 안 되는 것에 이유가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아프고 아플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이란 존재다.
난 하나님을 믿으면 고쳐줄 줄 알았지만, 육체는 안 고쳐지고 하나님과 가까워지려는 노력만 늘었다.
그리고 안 고쳐지는 나를 보며 혼자 배신감 느끼고..
주님은 날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난 아무래도 그 사랑을 모르는 것 같다. 남들이 말하는 사랑 말고, 하나님이 직접 나한테 말하는 사랑 말이다. 일시적으로 사랑을 느낄 때가 있었지만, 일시적인걸 늘려나간다 해서 육체의 아픔에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다.
바울은, 어떻게 세 번 기도하고 바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바울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믿은 걸까.
나는 알 수 없고 많은 정보로 여기저기 말하는 해석을 제쳐, 나만의 하나님과 아픈 몸에 대해 어떤 생각을 심어야 할까.
안 고쳐지는 몸인데도 난 하나님을 왜 아직 못 놓는 걸까. 안 고쳐지는 몸인데도 난 하나님이 고쳐줄 거라 아직도 희망을 갖는 걸까.
방법이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