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큼이를 키우면서 드는 생각은 내 의식과 무관하게 '존재확인'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큼이가 태어나고 키우면서 '상큼이에게 나라는 존재가 전부겠지'라는 생각으로 내 존재가 있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상큼이가 나에게 있어야만 하는 존재 같았다. 소아과 유튜브에서 육아로 올인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는데 엄마들이 왜 올인하는지 알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디서든 확인받으려 하는 게 본능인가 싶기도 했고, 정체성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부를 때 내가 살아있구나를 경험하는 기분이랄까.
누군가가 내 이름을 안 부르고 뭉뚱그려서 표현하면 내가 무시당했다는 기분이 든달까.
누군가가 나를 부른다는 것은 결국 존재를 부여해 주는 거 아니겠는가.
지인들을 만날 때, 그러다 상처를 받았을 때, 대화를 하거나 할 때.
나는 내가 존재하고 있다를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이랬고 저랬고, 나는 그랬고 저랬고, 그러냐 나도 그러하다' 등등
나는 나에 대해 말해주는 것을 즐겼다. 그리고 타인에게 나와 같은 생각일지 호기심이 많았다. 그 성향 덕분에 타인에게 질문도 자주 던졌다. 스스로 물어본 것을 타인에게도 물어보면서 생각을 넓혀갔었다. 그런데 결국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냥 '내가 존재하고 있어서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내 존재를 확인하려고 했던 때도 있었고, 이건 정말 고치기 힘들었다.
그리고 완벽하게 고쳐지지도 않았다.
때문에, 타인이 뭐라고 하던, 내 존재를 오해하던, 존재에 대해 비하하던 타격이 별로 없는 사람은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설교 때 꾸준히 들었던 '나의 정체성'은 생각보다 깊고 중요했다.
사실 그때만 해도 못 알아들어서 와닿지도 않았고 적용도 못했다. 그저 그렇다니까 알고만 있을 뿐이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그 정체성은 무의미했다. 나에겐 그랬다.
하나님을 알고 믿고 날 사랑하신다는 것도 얼핏? 생각하지만, 내 정체성까지 부여하는 게 와닿지 않았다. 날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데, 이 작은 나를 위해 그러셨을까? 지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러셨겠지로 마무리한 나의 정체성.
그리고 하나님은 내 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느끼기엔 하나님은 누구의 편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나의 정체성과 존재확인은 많은 사람들 중에 한 명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시긴 하는데 다른 이들도 바라보시겠지! 하는 생각.
저게 사실인데도 나는 힘들어했다. 정말 누군가가 아낌없이 내 편이 되어주길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남편이 생기면서 자기 확신도 생기고 자기 전에 까먹었던 내 존재 이름을 불러준다. 그거로 '아, 내가 있었네.'라고 생각하고 잠이 든다. 그리고 지금까지 늘 곁에 있는 사람들 덕에 추억을 얘기할 때마다 '그때 내가 있었네.'를 확인받는다.
상큼이를 키우면서 하나님이 날 이렇게 바라보시는 걸까 추측을 해본다.
그러면서 상큼이가 있음으로 내가 있구나 하는 순서를 바꿔 생각하기도 한다.
명확하게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고 어디선가 영향을 줄 수 있는 에너지가 있는 사람이다라는 자기 확신을 가졌다면, 이렇게 헤매면서 타인의 시선과 판단에 나를 맡기지 않았을 텐데...
지난날에 나는 자기 확신과 존재확인이 부족했음을 상큼이가 태어나고서야 이해했다.
나는 여기 있고, 너는 거기 있고.
너와 내가 대화를 나누고 서로 이름을 불러주면서 존재확인을 해본다.
우리 살아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