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적어보는 그림들

브런치를 시작하며

by 은민

브런치는 종종 검색에 걸려서 들어와 보면 굉장히 지조있고 교양있는 어투의 글들이 많다보니 네이버 블로그에서 음슴체로 주절거리다 브런치를 쓰려니 글이 좀 정돈은 되어있어야 할 것 같은데 뭘 먼저 얘기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좀 어색하다. 뭐.. 처음이니까 하고 싶은 얘기부터 해보겠다.


네이버 블로그에다가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 일상 얘기나 주로 스트레스 받는 것들,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고민들, 비공개글로 쌍욕할 때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해외 영화, 드라마, 그때그때 푹 빠져있는 롹음악들을 모아서 짧은 감상평도 쓴다. 나의 네이버 블로그는 몇 년째 할 일을 다 잘 수행하고 있지만 이번에는 단 한가지 임무를 맡길 생각으로 브런치를 만들었다.


(밑밥을 깔자면.. 나는 미술 전공자가 아니고,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아서 미술 관련 지식이 많이 없다)



itsame.jpg 나, 다리 각도가 좀 요상하지만 그래도 이 그림을 좋아한다


나는 그림 그리는게 취미다. 근데 취미라고 하기에는 자주 그리진 않는다. 그림을 그리면서 시행착오가 너무 많고 손도 굉장히 느려서 그림 한 장 그리는데 최소 한 달은 걸린다. 그마저도 한달에 한 장 꼬박꼬박 그리는 것도 아니라 일년에 해봤자 그림 두 장 정도 나오는 것 같다. 취미라고 하기엔 부끄러운 수준이다. 솔직히 어려서 그림 그리는 걸 딱히 좋아하진 않았다. 딱히 배울 생각도 없었고 취미로 삼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내 마음에 들면서도 주변 사람들이 좋아해주는 그림을 한두장 그리게 됐고 그게 자랑스러워졌다. 결과적으로는 나를 누군가에게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 요소가 되어버렸다.


초반에 인물 팬아트를 많이 그렸다. 내가 좋아하는 해외 영화, 드라마 캐릭터, 가수, 배우들을 보면 그림으로 남기고 싶어졌다. 캐릭터화보다는 최대한 실물을 담고 싶었다.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리면서 내가 이 사진을 해석하고 변형하는 어떠한 작업도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내 그림에는 나만의 스타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는 그림 작가가 아니니까 나만 좋으면 아무래도 상관없긴 하지만, 동시에 나만의 그림체를 갖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했다.


alyssa.JPG <빌어먹을 세상따위>의 앨리사


그렇게 평생 이런 그림만 그리고 살 줄 알았는데 2021년 초 쯤 중고 타블렛을 사고, 그 해 가을 쯤에 아이패드를 사면서 다른 것들을 시도해볼 수 있게 됐다. 색깔도 자유롭게 쓸 수 있었고, 다양한 브러시들도 써볼 수 있었고, 연필 종류까지 다양해졌다. 나는 좋아하는 작가였던 앨리스 X. 장의 스타일을 최대한 따라서 그려보기도 하고, 웹소설 표지에 등장할 것 같은.. 아니면 인스타그램 인기 게시글에 떠있을 것 같은 잘생긴 남자를 그려보기도 하고, 비주얼 디벨롭먼트 분야에서 일하시는 모 애니메이터의 강의를 한 두개 들으며 귀여운 캐릭터들을 따라 그려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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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져>의 버키 반즈 / 핀터레스트에서 본 잘생긴 모델

작년 6월쯤 개봉한 영화 <라이트이어>를 혼자 가서 봤는데, 픽사 영화치고는 그저 그렇다는 평이 많았지만 나는 별다른 이유 없이 좀 감명깊게 봤다. 버즈가 빛의 속도로 우주선을 몰면서 지상의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버리는 내용이 나오는데, 단골 소재이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 소재였고, 버즈 영화를 처음 본 앤디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달까나 어쨌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엔딩 크레딧이 딱 뜨자마자 처음 든 생각은 이런 애니메이션의 엔딩 크레딧에 내 이름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였다. 다시 중고등학생 때로 돌아가 애니메이션을 배우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을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막상 돌아가도 내 선택을 바꾸진 않을 것 같다) 굳이 회사에 소속된 애니메이터가 되지 않더라도 순수한 그림체로 이야기하는 인생과 꿈들... 나도 그런 걸 하고 싶었다.


darilium.jpg <닥터후> 닥터와 리버, 다릴리움의 밤

그렇게 해서 1년이 지난 현재까지는 이런 귀여운 그림들을 그리고 있다. 애니메이션 그림체를 좋아하는 이유는 좀 더 길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은 생각 정리가 잘 안돼있어서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글로 써보겠다.


나는 그렇게 창조적인 사람은 아니라서 평생 팬아트나 그리며 살 줄 알았는데 어쩌다보니 작년 10월 경부터 내 이야기가 있는 오리지널한 그림을 한 장 그리게 됐다. 교환학생을 가기 직전에 이 그림을 완성하고 50장 프린트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미국 가기 전에 50장 더 프린트해서 미국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나눠줬다. 흔한 구도, 흔한 캐릭터 디자인이더라도 내가 생각한 구도, 내가 생각한 캐릭터들, 내가 생각한 자세, 내가 생각한 대사, 그리고 내가 본 세상에 기반한 그림이라는 점에서 더욱 당당했다. 내 그림 인생의 변곡점이었다. 나는 내 전공인 컴퓨터에는 큰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컴퓨터 배우는 학생' 이외에 나를 소개할 방법이 하나 더 생겼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프린트.jpg 이 그림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가 있어서 다른 글로 빼보겠다


근데 그림을 나눠주면서 생각해보니까 이 사람들이 좋아해주는 것도 좋은데 누군가 이 그림의 뒷이야기를 물어봐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 그림을 그리게 됐는지! 그게 궁금한 사람은 많이 없다는 걸 알지만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배경과 내 감정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어디든 얘기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가끔 누군가 물어보더라도 내 쪽에서 그들은 자세한 이야기는 관심없을 거라고 지레짐작해버리고 그냥 짧게 설명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림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면 좀 없어보이는 걸까? 하는 생각도 가끔한다. 예술가들은 대체로 과묵해보이니까 내가 하려는 게 예술이라면 약간 그럴 수도 있을까 싶으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건 예술이 아니라 그냥 내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 없어 보인다고 현재로써는 결론을 짓는다.


그렇다.. 앞으로 그림을 그릴 때 이 공간을 내 주변 사람들에게 못다한 비하인드를 이야기하고 내 자의식 과잉을 해소하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 또 그 과정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내 그림을 보여주고 싶다. 인터넷 세상은 나에게 관심없는 사람이 더더욱 많겠지만 그래도 내 이야기에 관심있을 단 한 명이라도 찾아본다.


예상하건대 새 글을 쓰는 건 굉장히 뜸해질 것 같다. 위에도 썼다시피 난 그림을 정말 가끔 그리기 때문에.. 그래도 난 오래 그림 그리고 싶으니까 몇십년 후에는 글이 많이 쌓여있지 않을까? 이렇게 오픈된 공간에 글 쓰기 시작하면 그림도 좀 더 자주 그리게 되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하며 첫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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