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번 국도 위에서 그림 그리다

Route 50

by 은민

첫 글에서 짧게 언급했다시피 브런치를 만든 이유가 이 그림 하나라서, 작가 신청이 승인된 후에 서랍에 저장해 둔 글을 발행하려다 그냥 이 그림에 대해 먼저 얘기해 보기로 하고 새 글을 쓴다. 내 지인들이라면 이 그림을 질리도록 구경했겠지만, 그중 아무도 이 브런치의 존재에 대해서는 모르기 때문에 편하게 했던 얘기들과 하고 싶었던 얘기들, 어떻게 이 그림을 그렸는지 적어보겠다.


이 그림은 작년 10월 말쯤부터 그리기 시작해서 12월 중순쯤에 이 정도면 그래도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들은 다 그렸다고 생각하면서 마무리된 그림이다. 나한테는 정말 특별한 그림인데,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린 얼마 안 되는 그림들 중에 아직까지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왜 나한테 특별하냐면, 그전까지 그렸던 그림들처럼 사진을 보고 그린 그림도 아니고, 특정한 영화 장면을 그린 것도 아니고, 내가 운전면허를 취득한 어느 날의 별거 없는 경험을 바탕으로 그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작년 하반기에 미국 교환학생을 앞두고 휴학하면서 겸사겸사 면허를 땄다. 나는 10월 26일에 도로 주행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고 곧장 내가 도로 주행 시험을 본 그 차로 도로 주행 코스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 떨궈졌다. 거긴 가평이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빨간 버스를 타고 잠실에 내려서, 다시 지하철을 타고 강남면허시험장에 가서 면허를 수령해야 했다.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햇볕은 뭔가 포근하고 운전면허는 일단 해치웠다는 마음이 가벼웠고, 시골은 아니었지만 시골길처럼 주변은 차도 사람도 없이 굉장히 한산한 그런 날이었고 난 버스 정류장에 혼자 서 있었다. 사방이 아주 조용한 가운데 빨간 버스가 전기차처럼 조용하고 아주 느릿하게 내 앞에 와 서서 차 문이 아주 조용하고 느릿하게 열리더니 선글라스를 쓴 기사 아저씨와 내가 눈이 마주치고, 내가 이거 잠실 가나요? 하고 물으니 아저씨가 고개를 한 번 까딱였다. 후에 버스에 올라타니까 버스에 남은 자리가 한두개밖에 없을 만큼 사람이 가득했는데 이 버스 밖의 한산한 광경과 굉장히 대비되면서도 버스 안도 너무 조용했기 때문에 요상한 기분이 들었다.


on the road draft.jpg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 나는 꽤 자주 영화 장면 속에서 처럼 사는 삶을 꿈꿨는데, 음악을 듣다 보면 종종 그런 기분을 체험해 볼 수 있었고, 미국에 가고 유럽을 돌아다니고 특별한 곳을 거닐 때 비로소 꿈을 실현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 날은 아무 음악도 들리지 않고 한국인에게는 특별하지도 않을 평범한 서울 외곽의 버스 정류장에서 나는 어떠한 영화 속의 한 장면에 들어가 있는 기분을 느꼈고, 아무도 본 적 없을 그 영화를 세상에 드러내고 싶은 욕심이 생겨 다음날 스케치를 시작했다.


버스(?)와 운전자, 짐을 들고 어딘가로 떠나는 아이를 그렸다. 다들 이 아이를 소년이라고 생각하지만 짧은 머리에 후줄근한 후드티와 운동화는 '나'를 표현할 때 항상 포함하는 요소이기 때문에 사실 여자라고 생각해도 상관은 없다. 이 아이는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잠실 가는 버스예요? 라고 말하게 해야 하나.. 그런데 나는 이 친구가 허무맹랑하게 머나먼 곳을 가기 위해 무작정 떠나는 사람이 되길 원했고 잠실은 너무 현실적이고 가까웠다. 그곳에 가는 일이 이루기 어려운 꿈일 수 있을만한 곳이어야 했고 미국에서의 홀로서기를 앞둔 나는 단순하게 뉴욕(= 꿈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가는 차를 히치하이킹하는 촌뜨기로 만들기로 했다. 클리셰스러운 스토리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이야기다.


on the road draft 2.jpg


덧그린 스케치에서는 버스는 트럭이 됐다.아이는 운전자를 올려다보면서도 눈높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지 않게, 또 승용차보다는 로드트립의 느낌을 첨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배경은 사막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주 한산하고 모래 먼지 날리는 시골이었으면 해서 처음에는 저 멀리 캐니언들이 보이게 그리려고 했다. 옥에티가 있다면 난 미국을 생각하고 그렸는데 그려놓고 보니 운전석이 오른쪽이었다.


on the road draft 3.jpg


선글라스를 쓴 운전사는 할아버지로 바꿨다. 예전에 모 애니메이터가 그린 일러스트 속의 할아버지를 보고 할아버지의 존재가 더해주는, 아이를 바라보는 어떤 관용적이고 따스한 느낌들이 좋았다. 또 계획했던 캐니언을 그리면 배경에 힘이 들어가 시선이 분산되는 것 같아서 캐니언 대신 구름을 추가했다.


on_the_road.jpg


트럭 뒷통수에는 누군가 붙여놓은 스티커를 그렸는데 Emma의 두 번째 m을 떼어내고 스티커가 붙어있던 흔적을 남겼다. 이스터에그마냥 자아 표현도 좀 해봤는데, Em은 내 이름의 이니셜이자 미국에서도 종종 쓰던 내 영어이름이다.


이 그림은 최종적으로 인스타그램 필터로 보정됐는데, 처음부터 이런 색감으로 그릴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적절하고 조화로운 색을 고르는 건 정말 어려운 것 같다. 나는 언제나 색칠에 제일 약했다. 색감 보정을 하고 나니 모든게 완벽해 보였다. 바로 오프린트미에서 배송비만 내고 50장을 프린트했다.


프린트.jpg


나는 이 그림을 명함처럼 들고 다니면서 친구들한테 나눠주고, 미국으로 떠나서도 기숙사 친구들, 교회 사람들, SXSW 축제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하듯이 나눠주고 요즘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종종 나눠준다. 이 그림을 보여줄 때면 항상 하고 싶은 말이 많고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서의 내가 드러나는 것 같다. 팬아트를 그릴 적에는 느끼지 못했던, 내가 그림으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이 그림은 on the road나 route 50 이라고 부르고 있다. 미국 50번 국도는 미국 서쪽 끝에서 동쪽 끝을 가로지르는 아주 긴 도로인데 미국의 가장 외로운 도로로 불린다고 한다. 무작정 뉴욕에 가겠다는 꿈으로 어느 날 짐가방 하나만 챙겨서 외로운 길 위로 나온 어린 아이가, 어떠한 이유로 정든 동네를 떠나 다른 주로 이사 가는 할아버지를 만나는 장면을 상상하며 그렸다. 어쨌든 디테일은 보는 사람 마음이다.


(아, 참고로 난 이번 미국 교환학생 기간 동안 짧게 뉴욕 여행을 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 히치하이킹을 하진 않았고, 얌전히 맨하탄 행 기차에 올라탔다.)




- 내가 가장 사랑하는 노래인 아비치의 Sunset Jesus에 누군가 카이고의 Fiction을 매쉬업한 버전을 들으면서 그렸다. 맨 위쪽에 첨부한 영상이다. Sunset Jesus는 큰 꿈, 현실과 이상의 괴리와 놓지 못하는 희망에 관한 노래다. 이 음악을 처음 들은 순간부터 언제나 꿈꾸는 평범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그런 사람이니까.


- 항상 그림 그려서 할아버지한테 보내주면 할아버지가 칭찬을 해주셨는데, 이 그림을 그리던 중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결국 못 보여드렸다. 할아버지가 봤으면 이번에도 엄청 좋아하셨을 텐데, 아쉽고 슬펐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