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후> 60주년, 윌프레드와 나
⚠ 이 글은... 굉장히 덕후스럽다 ⚠
오랜만이다. 그 사이에 마음에 드는 그림을 몇 장 더 그렸는데, 그중 하나를 또 소개해보려고 한다.
올해 5월 말에 미국 교환학생 일정을 마치고 곧장 런던으로 떠났다. (그 과정에서 뉴욕 JFK 공항에서 굉장히 배고픈 상태로 노숙을 했는데, 영화 <터미널>에 나오는 톰 행크스가 된 것 같아서 나름 즐거운 경험이었다.) 각종 영화나 드라마를 보며 런던의 감성과 낭만을 동경하는 여느 사람들처럼, 초등학생 때부터 <닥터 후> (영국의 SF 시리즈)의 열렬한 팬이었던 나 또한 마음속 특별한 공간에 런던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놀랍지 않게도, 런던에서의 2주는 많은 부분이 닥터후였다. 버킹엄 궁의 근위병 교대식을 (세 번이나) 보러 갔을 땐 버킹엄 궁전 위로 추락하는 우주선 타이타닉 호를 떠올릴 수 있었고(닥터후 : 저주받은 자들의 항해), 철문으로 굳게 닫힌 다우닝 가를 지나면서는 인간의 가죽을 입고 영국 수상으로 변장한 외계인 슬리딘을(닥터후 시즌1), 또 런던 아이를 마주하는 템즈 강변을 따라 걸으면서는 닥터후의 첫 에피소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런던 아이 지하에 숨어있던 외계인 네스틴 의식은 런던 아이를 전파 송신기로 사용하며 마네킹들을 조종해 지구를 침략하려 한다)
유명한 관광지나 촬영지가 아니더라도, 빨간 더블 데커 버스에 올라타며 오이스터 카드를 찍고, 런던의 스카이라인이 보이는 언덕 위에 올라가고, 특별할 것 없는 갈색 벽돌의 주택가를 거닐면, 또 다른 재미거리를 찾아 지구에 착륙한 주인공 닥터의 우주선 타디스와 무료한 일상 속 난데없이 닥터를 마주치고 함께 시공간으로의 모험을 시작하게 되는 런던의 한 평범한 소시민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스물셋이 되어서야 처음 방문한 런던은 여전히 내 어린 시절의 환상을 완벽하게 충족시켜 주는 곳이었다. (날씨가 너무 좋았던 것만 빼면 말이다)
올해는 <닥터 후>가 방영 60주년을 맞이하는 해인데, 공교롭게도 닥터후의 첫 방영 일자는 11월 23일로 내 생일과 같았기 때문에 2023년 11월에 런던에 머물며 생일을 보내는 것은 (이루지 못할 것을 알고 있는)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비록 그 꿈을 완벽하게 성취하진 못했지만, 올해 런던을 여행한 것 자체로 너무 행복했던 경험이었기 때문에, 첫 런던 여행 + 닥터후 60주년 + 내 생일 + 닥터후와의 오랜 추억을 기념하는 그림을 그려보기로 했다.
텍사스에서 산 파란색 자켓을 입은(런던에서 주구장창 입고 다녔다) 내 옆에, 나는 물론 주인공 닥터를 그릴 수도 있었겠지만, 대신 내가 제일 좋아했던 조연 캐릭터인 윌프레드 모트를 그렸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윌프레드는 작중 닥터의 동행자인 도나의 할아버지로, 외계인에 대한 독특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 그는 밤마다 뒷마당에 나가 보온병에 담긴 차를 마시며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으로 묘사된다. 닥터의 많은 컴패니언(닥터와 함께 모험하는 등장인물)들이 그렇듯, 그 또한 닥터후의 시청자들을 대변하는 캐릭터였고, 외계인 이야기와 별 보기를 좋아했던 어린 나는 자연스럽게 윌프레드에 내 모습을 투영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의 장면 중 하나는, 외계인 아디포스의 거대 우주선이 런던 시내 한복판을 침략(?)했을 때(닥터후 시즌4 1화), 그는 정작 반대편 하늘을 보고 있느라 우주선을 발견하지 못하는 장면인데, 그것이 너무 안타까웠기 때문에(덕후는 계를 못 탄다 했던가...) 그와 함께 있어주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나의 현실에는 닥터와 아디포스 우주선은 없지만, 런던을 여행하는 동안 내가 보지 못하는 저 멀리 런던 어딘가의 상공을 날아다니고 있을 닥터의 타디스를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에, 런던에서의 감상을 잘 드러내는 한 장의 그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런던에 온 첫날 밤 캐리어를 끌고 숙소로 가다가 건물 사이로 살짝 휘어진 핑크빛 구조물의 끄트머리가 보여서 런던 아이라고 생각하고 엄청 설렜는데, 사실 숙소가 템즈 강으로부터는 많이 떨어져 있는 곳이었어서 그게 정말 런던 아이였는지는 알 수 없게 됐다)
11월 23일에 맞춰서 완성!
닥터후 60주년 특집은 11월 25일부터 3주간 3부작으로 방영됐는데, 이 글을 쓰는 오늘로 모두 완결이 났다. 2부에서는 윌프레드를 잠깐이나마 다시 보게 되어 반가웠고, 비록 해당 배우(버나드 크리빈스)는 지난해 별세하셨지만, 3부에서 '윌프레드는 두더지 사냥을 떠났다'라고 언급되는 걸 보며 닥터후 세계관 속에서 여전히 살아갈 그의 캐릭터를 떠올린다. (이번엔 그가 좋아하던 닥터와 계속 함께하며!)
정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뒤로 남기고 다시 나아가는 닥터후와 앞으로 또 만들어 갈 추억들도 기대가 된다.
- 어두운 배경을 한 번도 그려본 적이 없어서 픽사의 아트 디렉터였던 츠츠미 다이스케의 <몬스터 대학교> 컨셉 아트를 참고했다. 특히 빛 표현은 너무 어렵다. 그런 것들에 대해 처음 생각해볼 수 있었다.
- 미국으로 처음 떠났던 날로부터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올해 텍사스 오스틴에서 평생 남을 좋은 기억들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그 추억들을 그림으로 기록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 곧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하는데, 꾸준히 내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환경과 그럴 의지가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