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를 동경한 디자이너

비전공자 디자이너, 일단 오늘도 출근했습니다.

by 먹구름

(1) 마법사를 동경한 디자이너

"안녕하세요, 디자이너님! 좋은 아침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지난번에 공유 주신 초안 관련해서 수정 사항 피드백 남겼어요. 시간 되실 때 확인 부탁드립니다."

서울에서 서울로 출근함에도 불구하고 왕복 3시간이 넘게 걸리는 출퇴근길. 지친 몸을 이끌고 일단 비전공자 디자이너는 출근을 완료했다. 주말 동안 아무 걱정 없이 신나게 쉬고 다시 돌아온 월요일. 컴퓨터를 켜고 이메일함을 열어보면 지난주에 전달했던 초안 디자인 피드백이 머쓱한 모습으로 도착해 있다.

피드백 파일을 확인 후 찬찬히 훑어보았다. 어떤 피드백이 온 걸까?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문구 수정, 가격 수정, 오탈자 체크. 그 외의 디자인에 관한 피드백은 없었다.

이건 과연 다행일까, 불행일까?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소설 '해리포터'시리즈는 지금도 나에게 말도 안 되는, 희박한 한줄기의 빛을 선사한다. 어쩌면 나에게도 호그와트로 갈 수 있는 편지가 날아오지는 않을까 하는, 혹은 머글로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 나도 마법사는 아닐까 싶은 가능성 제로의 빛을 말이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 디자이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0에서 100을 만들어 낼 수는 없지만,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텍스트와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잘 어우러지게 구성하고 배치하여 '디자인'이라는 과정을 통해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직업을 가진 머글. 특히 전공자가 아닌 디자이너로 살아가는 것은 마법 세계에서 머글로 살아가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곤 한다.

'전공자가 아니니까'라는 핑계 혹은 족쇄가 이따금 나의 방향성에 의구심을 가지게 하곤 하였다. 그렇게 하루, 한 달, 1년, 3년이 훌쩍 지나 어느덧 주니어가 아닌 시니어 디자이너가 된 지금. 나는 어떤 디자이너인지 스스로에게 묻는 시기가 되어버린 것 같다. 어떤 기획이건, 스토리보드이건, 마케팅 플랜이건 제안만 받으면 척척 만들어내는 디자이너가 되리라 생각했던 과거의 나는 어쩌면 마법사를 동경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경력이 어느 정도 쌓인 지금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디자이너는 마법사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 누구보다 디자이너는 객관적인 데이터로 먹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디자인에 대한 별다른 피드백이 없는 날에는 스스로에게 의구심이 든다. '괜찮은 디자인일까? UI적으로 봤을 때 불편함은 없는 걸까?' 이런 날이 많아질수록 나의 디자인을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해 줄 수 있는 경력 많은 디자이너가 고프다.

이전 직장에서 주니어급으로 있을 때, 책임급 디자이너분이 평가해 주던 쓰고 아팠던 경험이 지금은 너무나 그립다. 시니어들만 있는 세계에서는 소위 말하는 '거기서 거기'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 든다. 디자인적인 평가가 아닌 마케팅적인 평가가 더 많은 공간에서, 디자이너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따금 디자인에 대한 평가가 "UX적으로 활용도가 높아서 레이아웃이 보기 좋다."라던지 "토글 형식이 적용된 것은 좋은 아이디어였다."와 같은 평가가 아닌 "별로 예쁘지 않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디자이너를 마법사로 만들고 싶어 하는 비디자이너들의 주문이 되어버리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스스로에게 되묻고 고민하던 나는 포토샵을 켜는 대신 펜을 들기로 하였다. 그리고 비전공자 디자이너로 살아가고 있는 나의 이야기와 고민을 하나 둘 꺼내보기로 결심하였다. 어쩌면 이건 디자이너로의 삶을 고민하고 있는 나에게 도피처가 될 수도, 숨구멍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나의 작고 작은 이야기가 조금이나마 나와 같은 비전공자 디자이너에게, 디자이너를 꿈꾸는 비전공자에게, 혹은 디자이너로 살아가고 있는 그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공감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