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 양>처럼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면서 생각했던 이야기들은
머리를 말리면서 전부 사라져 버린다.
다음부턴 머리 말리기 전에 노트라도 해야겠다.
우리는 수많은 기억들을 남기고 그만큼 잃어간다.
요즘은 얻는 것보다 잃어가는 것이 더 많아진다.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건 처염할까.
(영화 <애프터 양(2022)>에 관한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코고나다 감독의 영화 <애프터 양(2022)>은 테크노사피엔스(인공지능 로봇인간) '양'의 작동 정지 후 그의 기억을 추적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제이크, 키라 부부는 그들의 입양딸 미카(중국 태생)에게 중국의 문화를 알려주기 위해 인공지능 로봇을 구매한다. 인공지능 '양'은 문화를 알려주는 것 외에도 미카의 오빠로서 가족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로봇이었다. 양은 갑작스럽게 작동을 멈추고 그의 빈자리는 가족들에게 쥐어진다.
영화가 배경으로 하는 사회에선 인간형 인공지능 로봇들이 가족을 대신하기도 하며 인간 생활에서 사람들과 다양한 상호작용을 하며 공존한다. 로봇은 도구로써 손쉽게 교체되기도 하고 혹은 다른 집안으로 팔리기도 한다. 양이 고장 나고 제이크는 그를 구매하는 데 사용한 비용을 먼저 생각한다. 키라는 양의 빈자리를 자신과 제이크가 함께 채워나가기를 희망한다. 양을 수리하기 위해 방문한 곳에서 제이크는 양의 기억장치를 발견한다. 연구자의 도움으로 기억장치를 열게 되고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양의 기억과 함께 열린다.
테크노 사피엔스들에겐 기억 장치를 통해 몇 초간 녹화할 수 있는 능력들이 장착되어 있었다. 연구자들은 그 기억을 분석해 로봇들이 기억을 저장하는 기준을 분석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생활 보호에 저촉되는 연구임을 인정하게 되면서 관련 모든 연구는 중단된다. 그럼에도 양에게는 그 기억장치가 남아있었다.
영화는 양이 유독 좋아하는 오래된 카메라로 가족사진을 찍으면서 시작한다. 가족이 얼른 오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양은 한 동안 자신을 제외한 가족들의 모습을 자신의 저장 장치에 담는다. 코고나다 감독은 이 모습을 양의 저장 장치에 담긴 생생한 원본의 기억과 제이크가 풀어놓는 기억을 여러 층에 걸쳐서 표현한다. 사운드는 선행 혹은 후행하며 조금씩 오류를 범하지만 양이 남긴 기억은 '가족사진'이라는 개념에 해당한다.
양의 기억 대부분은 가족과 연인 에이다와 관련되어 있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 기억은 변형되거나 오염되지 않는 불변의 기억으로 남는다. 사진을 찍듯 남긴 기억들은 그를 채우기 시작한다. 거실에서 양의 기억들을 몰래 보던 제이크는 딸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미카 : "영화 봤어요?"
제이크 :"응"
미카 : "어떤 영화요?"
제이크 : "그냥 다큐멘터리"
미카 : "눈물 날 정도로 지루해요?"
마지막 말에 제이크는 가볍게 웃어넘긴다. 양의 기억은 다큐멘터리다. 조작도 연출도 없이 카메라가 담아내는 시선만이 존재하는, 양의 시선만 존재하는 다큐멘터리다. 그리고 그 다큐멘터리는 제이크가 눈물을 흘리도록 만들었다.
제이크가 양의 기억장치를 열면서 마주한 것은 양의 연인 에이다의 관한 기억이다.
"우리 감각은 매번 다르게 저장되고 우리에게 속삭인다. 그들은 존재하고 그러므로 우리도 존재하고 더 나아질 수 있다."
양과 에이다의 기억 속에서 듣게 되는 에이다의 속삭임.
인공지능 양과 복제인간 에이다는 자신들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갖고 있었을까.
감각이 존재하고 이것은 우리들을 더 나아질 수 있도록 만들어줄까.
매번 다르게 저장되는 감각이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믿는다. 다르게 저장되는 감각은 양에겐 기억이 될 것이다. 그러니 로봇과 복제인간, 우리는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생각이 우리를 존재하게 만든다고 했다. 그러니 양과 에이다의 말도 일리 있는 말이다. 그들은 기억을 갖고 있으니, 그들은 스스로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양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를 계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생 미카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에 힘들어하자, 양은 접목된 나무줄기를 보여주며 새롭게 연결된 가족의 의미를 설명해 준다. 미카는 "그럼 오빠도 그렇겠네". 양 또한 새로운 가족에 연결된 나무줄기라는 것.
그러나 양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 양은 매매를 통해 제이크 가족의 구성원이 된다. 어쩌면 그도 제이크 가족에 입양된 사람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외부인이었던 양이, 필요에 의해 가족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는다. 그런데도 그는 스스로 미카와 같은 위치에 놓였다고 생각했을까. 로봇으로 입양된 본인은 고장 나거나 쓸모가 된다면 언제든 교체될 수 있는, 파양 될 수 있는 존재였을 것이다. 이미 양은 세 차례 구매되어 사람들과 함께 했고 아이들을 돌봤으며 환불 처리를 받는 등 온전히 로봇이기에 경험할 수 있는 일련의 과정들을 겪는다. 그럼에도 양은 제이크 가족과 함께해 행복한 기억들을 남긴다.
양의 빈자리를 스스로 채워나가고자 했던 키라는 양의 기억들을 접하면서 변화를 경험한다.
양 : "애벌레에게는 끝이지만, 나비에게는 시작이다."
키라 : "너도 그 말 믿어? 끝은 곧 시작이라는 말"
양 : "모르겠어요 제겐 그런 믿음은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거든요. "
"하지만 끝에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괜찮아요. 무가 없으면 유도 없으니까요."
양의 기억과 키라의 기억은 이번엔 상충한다. 두 기억 모두 동일하게 대화를 나누지만 다른 기억에선 양이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영화에선 기억의 진위여부를 판별하려 하지 않는다. 양은 로봇이기에 그가 눈물을 흘린 것은 키라의 기억 속, 그녀의 감정이 이입되어 조작이 가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감독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없애고 있다. 눈물을 흘리면서 양은 말한다. "무가 없으면 유도 없으니까요."
제이크 : "양이 인간이 되고 싶어서 힘들어했나요?"
에이다 : "너무 인간적인 질문 아닌가요?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이 인간처럼 되고 싶어 한다고 믿어요."
"인간이 되는 게 무엇이 그렇게 대단해서요?"
돌고 돌아, 양이 남긴 기억들은
인간이 되고 싶어서 고통스러워하며 남긴 기억들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의 기억에서 인간적인 면모들을 읽어낼 수 있다.
가족 간의 소소한 행복
연인과의 추억
비 온 뒤 하늘의 무지개
일상에서 너무 쉽게 지나치는 시간의 작은 파편들
그가 탐구한 정체성의 정체는 인간과 비인간의 관한 탐구가 아니다.
아시아인의 조건을 탐구하고 로봇으로 입양된 인물이지만
그는 인간이 되고자 분투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의를 내리고자 했다.
무와 유의 관계처럼,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는 서로가 없다면 알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다.
허나 양에게 이 관계에서 경계는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어쩌면 그의 태도 때문에 우리는 그 경계를 더더욱 알게 될 수도 있다.
양이 남긴 기억들로부터
제이크 가족이 그러하듯
우리는 우리를 돌아본다.
(후반부, 제이크와 에이다가 함께 숲길을 걷는 장면은 나를 항상 감성에 젖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