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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막내작가 Jul 22. 2022

목적지를 알 수 없는 여름

: 타닥타닥 제주에서 3주 차

19일, 목적지를 알 수 없는 여름


 올여름은 어느 때보다 버라이어티 하다. 예상했던 일이고, 예상만큼이나 변화무쌍하다.

 우선, 제주도 여행이 끝나면 우리가 어디에서 살게 될지 모른다. 우리의 거주지를 자의로 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먹고사는 일이 중요하므로, 또 다른 일의 결과에 따라 향후 거주지가 결정된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세는 것. 그것들에 대비하여 여러 가지 상상을 해보는 것. 결국 우리가 어디로 가게 될지 지켜보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제주도 한 달 살이라니... 참, 버라이어티 하다. 파도가 어디에서 어떻게 칠 지 모르는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기분이다. 


 제주에서의 하루하루 역시 참 다채롭다. 발걸음이 닿는 곳,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코로 맡는 대부분의 것들이 이전에 경험해보지 않은 것들이다. 그 다채로운 감각들 덕분에 해본 적 없는 생각들이 떠오른다. 매일 걷는 아침 산책길에서 매일 다른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지금 이 여름, 여러 가지 의미에서 참 버라이어티 하다. 그 변화무쌍함이 우리를 설레게도 하지만, 우리를 불안하고 두렵게 만들기도 한다.

 자주 서로의 등을 쓸어내리고 토닥인다. 나의 두려운 마음을 그의 등에서 쓸어내리고, 그의 불안한 마음을 내 등에서 토닥인다. 



20일, 마흔이라


 이른 저녁을 먹고, 소길리 책방 '섬타임즈'에서 진행하는 행사에 다녀왔다.

 '마흔 이후, 중년의 삶'을 주제로 3명의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마음이 조금은 위안되더라.

 결코 녹록지 않은 삶의 이야기들을 담담하게 풀어낸 이후에는 몇 개의 질문과 답들이 오갔다. 무기력함, 불안, 젊음/늙음 등이 주제였다.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혼자 생각했다. 아마도 우리는 '어른'이란 단어의 정의를 잘못 내리고 있는 게 아닐까. '어른이 된다'는 건 삶의 경험들과 성찰을 통해 완벽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보니 삶이 생각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게 되는 것 아닐까. 그래서 나도 짠하고 당신도 짠하고 그도 짠하고 그녀도 짠해지는 게 어른이 된다는 걸까?

 삶이란, 제주의 바다만큼이나 변화무쌍한가 보다. 아름답고 불안하고... 원래 그런 거구나. 불안의 파도에서 서핑을 하고, 아름다움의 바다에서 카약을 즐기면 되는구나.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바람이 제법 부는 날, 신창리(제주의 서쪽) 바다
바람이 잔잔한 날, 애월읍(제주의 북서쪽) 바다 / 필터를 전혀 쓰지 않은 사진이다. 모든 사진이 그렇다.


 늦은 저녁,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제비를 닮은 가게에서 깐풍기 소스를 입힌 치킨을 먹었다. 아주 맛이 좋았지. 제주의 제비들이 생각나서 왠지 마음에 들었지. 가게 안에 흘러나오는 오래전 노래들도 참 좋았지. 다 좋았는데... 한밤중에 자다가 깼지. 체했던 거지. 뭐가 문제였을까? 문제는 나였다.

 며칠 전 사이즈가 맞지 않은 바지를 무리하게 구매한 내 탓이다. 제주의 에메랄드 바닷빛을 닮은 연청색 반바지에 마음을 빼앗겨... 허리가 조금, 아니 제법 꽉 끼는데도 일단 사고 보자! 했던 바지다. 매일 만 보 넘게 걸어 다닌 지 3주를 보내고 있었으므로, 살이 조금 빠지지 않았을까? 어라? 기분 탓인가? 이제 허리가 맞는 것 같네? 그렇게 억지로 바지에 내 허리를 졸라매고 하루 종일 다녔던 탓.


 갑자기 옆 테이블 부부의 대화가 생각난다. 

 셀카를 찍으려던 남자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카메라를 끄며 말한다.

 "뭐가 문제지? 내 얼굴이 문제인가?"

 건너편에 앉아 있던 여자가 말했다.

 "응, 모든 문제는 당신 얼굴이야."

 테이블이 가까워서 부부의 대화가 내 귀에 흘러들어왔다. 웃음이 입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참아야 했다.


번외


 제주에는 제비가 참 많다. 정말이지, 턱시도를 입은 것 같은 모습으로 하늘을 요리조리 날아다니는 모습이 귀엽다. 제비집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새끼 제비들은 더 귀엽다.

며칠 전, 아침 산책길에 발견한 '아기 제비 사형제', 아기 맞다. 어른 제비 아니다.

 이웃 작가님 덕분에 '비건 고양이'란 별명을 얻은 이 녀석과는 이제 친구가 된 것 같다. 아침마다 인사를 하러 오고, 뒷마당에 널어놓은 빨래 그늘 아래에서 드러누워 자고, 가끔 놀아달라고 내 발목을 문다.

 서로의 이름과 나이는 묻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아기 엄마일 거라 짐작하고, 아마도 아기들은 다 자라서 그녀 곁을 떠났을 거라 추측한다. 그녀가 앞 동 지붕 아래에서 거주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기도 했다. 그녀가 나에 대해 무엇을 상상하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쫌.. 쿨한 사이다.


21일, 순삭


 특별히 뭘 하지 않았는데, 하루가 다 지나갔다. 시간이 제주 바람을 타고 더, 더, 더 빨리 흘러간다.

 잘 자요. 굿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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