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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막내작가 Aug 10. 2022

잠시 지나갑니다.

: 타닥타닥 제주에서 33일

33일, 잠시 지나갑니다.


 2006년 여름, 제주도에 들어가 543일을 살고 육지로 나왔다.

 543일은 내게 그리 행복한 시간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제주도지만, 내게는 난생처음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 혼자 남겨진 곳이었다. 생일날 미역국을 먹지 못한 기억, 새해를 오롯이 혼자 보낸 기억, 휴가철에는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관광객들 때문에 표가 없어서 집에 가지 못한 기억 등이 쌓인 곳이다.

 다시 육지로 발령받기까지 제주도를 나가고 싶은 마음과 나가야 하는 나름의 이유를 찾아 열심히 소리 내야 했다. 그리하여 1년 반 만에 발령이 났다. 제주도를 떠나오던 날은 야근을 마치고 퇴근한 아침, 999cc 경차에 허겁지겁 살림살이를 싣고 배를 탔다.


 분명 그렇게 미련 없이 떠나온 제주도인데,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아쉬움과 후회가 남아 있었다.

 더 열심히 알아가고, 느끼고, 즐기지 못한 것이 그랬다. 마음속에 늘 543일이란 숫자가 미완성으로 떠다녔다. 아마도 제주도가 첫 발령지였기 때문에 유독 그랬던 것 같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리버리했던, 지금보다 더 철이 없었을 20대의 나였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살다 보니 내게 다시 33일이란 숫자가 주어졌다. 여행 말고, 살아가는 시간. 제주도에서 다시 33일을 살아볼 기회가 찾아왔다. 마음이 조금 설레었다. 우연히 16년 전과 똑같은 여름, 7월을 코앞에 둔 6월 말의 어느 날 제주도에 입도했다. 혼자만의 타임머신을 탄 기분이었다.



 참 많은 것들이 변해있었다. 제주도에 들어가는 나도, 늘 그곳에 있던 제주도도 변했다. 나는 늙었고, 제주도는 무섭도록 번화해버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제주도를 33일 동안 부지런히 알아가고, 느끼고, 사랑했다. 새벽 5시면 밝아오는 창문 너머로 지저귀는 새들 소리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한 시라도 더 빨리 제주도를 만나기 위해 기꺼이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숙소를 나섰다. 제주의 여름 바다를 두 발로 걸어 두 눈에 담아 오려고, 온몸이 땀에 젖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제주시 한경면 신창리 해안에서 바라본 바다는... 정말 아름답다.


 콩짜개덩굴을 만나고, 섬휘파람새 소리를 따라다녔다. 덥고 습해서 땀이 났다. 가끔 모기가 따라왔다.

 바다를 헤엄치는 남방큰돌고래들을 만나고, 까치가 매에게 잡혀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바다 바위 위에서 날개를 말리는 가마우지들을 자주 훔쳐봤다. 제비 사형제를 만나고, 매일 아침 13마리의 오리가족을 만났다. 숙소 앞 동, 현관과 지붕 사이에 거주하는 고양이와는 친구 먹었다. 고삐 없는 소 떼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어느 거리를 지날 때에는 익숙한 사거리에서, 길 가에 서 있는 간판에서, 이정표에서, 도로 모퉁이에서 지난 543일의 순간들이 새록새록 튀어나와 마음이 설레었다. 


 가장 애정하던 곳, 제주 올레 7코스를 찾아갔다.

 외돌개 오른편에 보이는 절벽 끝, 걸터앉으면 발밑으로 바다가 곧장 드리워지던 바위. 그리고 외돌개에서 돔베낭골로 이어지는 길, 그 길이 그리웠다. 그리웠던 만큼 헛헛함이 밀려왔다. 바위로 가는 길은 울타리로 막히고, 무성해진 덤불들 사이로 엉덩이를 걸터앉던 바위의 꼭대기 부분만 얼핏 보였다. 외돌개에서 돔베낭골로 이어지는 아름답던 길은 어느 리조트 건물이 신축되면서 공사 중이란 표지판으로 막혀 있었다. 헛헛한 마음을 핫도그 하나로 달랬다. 전자레인지에 데운 축축한 핫도그였다. 

제주도 서귀포시에 위치한 외돌개, 외돌개 우편으로 절벽을 따라 올레 7코스가 이어진다.
제주도에 와서 알게 된 콩짜개덩굴, 바위와 나무를 뒤덮는다.
송악산 둘레길 1 전망대에서 2 전망대 가는 길


 변해버렸거나, 여전하거나... 가늠할 수 없는 풍경들 앞에서 오롯이 지금 이 순간에만 만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려 애썼다. '나중'이란 없는 것들, 시간이 지나면 또 변해버릴 것들, 언젠가 아쉬워하고 후회할지도 모를 것들이 보였다. 어쩌면 모든 것이 그랬다. 시간 앞에서 변할 수밖에 없는 모든 것들이 그랬다. 제주도의 풍경도, 나의 모습도, 내 곁에 있는 이들도, 나를 둘러싼 삶이 지금도 변하고 있고, 앞으로도 변해갈 것이란 사실 앞에서 미묘하고 복잡한 마음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자주 나타나고 사라졌다.


33일, 마지막 날 제주시 용담포구에 위치한 카페에서 여객선 시간을 기다렸다.


 543일 더하기 33일이 완성되었다.

 543일을 지나왔고, 33일을 또 잠시 지나가는 간이역 같은 곳. 제주도가 내게 그렇다.


 지금껏 지나온 삶의 또 다른 간이역들을 떠올린다.

 어떤 간이역은 장소이고, 어떤 간이역은 사람이고, 어떤 간이역은 '일'이기도 했다. 오래 머물던 간이역과 잠시 스쳐 지나간 간이역들이 있다. 좋은 기억이 먼저 떠오르는 간이역이 있고, 씁쓸한 기억이 더 많이 남은 간이역이 있다. 기억에서조차 잊혀버린 간이역까지, 그 모든 것이 모여 내 삶의 한 장면 한 장면을 채우고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용기가 생긴다. 기쁘면 기쁜 대로, 화가 나면 화가 나는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삶을 조금은 담담하게 살아볼 용기가 생긴다. 그 모든 것이 섞여 또 내 삶을 채워나갈 테니, 내 두 발이 닿아있는 지금의 간이역에 온 마음으로 선다.


제주-목포 간 여객선을 타고 가다 보면, 크고 작은 섬들을 지나간다. 참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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