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순이 엄마 편> 1.
엄마와 친하게 지내는 동네 할머니들이 몇 분 계신다. 주로 여섯 분이 자주 모이는데, 나이가 제각각이다. 나이 차이가 많게는 30살까지 난다고 했다. 그중에는 할머니라 불리기에 너무 젊은 이도 있었다. 엄마가 "젊은 각시"라고 부르는 분인데, 풀네임은 "계란집 이층 각시"이다. 할머니들 사이에서는 월등히 젊었고, 예전에 계란집을 했던 가게 2층에 살기 때문에 덧붙여진 이름이다. 엄마가 매번 "각시"라 부르기에 나는 정말 새댁인 줄로만 알았다. 그분이 50대 후반의 아주머니라는 사실을 한참 뒤에 알고서는 허망했다.
아무튼, 여섯 명의 할머니들은 서로 무언가를 부지런히 나눴다. 부침개를 가져오고, 떡을 떼어 오고, 잼을 만들어 가져왔다. 갈비양념이 맛있게 되었다고 기어이 나눠오는 분도 계신다. 서로네 집에 김치가 오가는 건 다반사다. 김장철이 지나면 엄마가 담근 김치가 어떤 건지 엄마도 헷갈릴 정도로 말이다.
먹을 것만 나누면 참 좋을 텐데, 가끔은 자식들 이야기도 나눈다. 누구는 아들이 이번에 큰 집으로 이사를 갔네, 누구는 딸이 용돈을 얼마 줬네 등이다. 다들 고만고만한 형편에 힘들게 키워놓은 자식들이라, 자랑하는 낙이 어떤 건지 알 것도 같다. 그런데 가끔은 자랑이 누군가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준다는 점이 문제다.
일평생 일만 하느라 상한 몸만 남은 한 할머니는 딸이 그렇게 지극정성이랬다. 때마다 목돈을 챙겨주는 효녀를 둔 할머니였다. 하루는 그 할머니가 엄마에게 물었다고 한다.
"자기는 딸들이 용돈 얼마나 줘?"
엄마가 대답했단다.
"응! 많이 줘!"
그럴 리가 없었다.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서 엄마에게 용돈을 드린 적이 없다. 언니는 제 식구들 아등바등 살기 바빠 여력이 없다. 엄마에게 용돈을 줄 수 있는 딸들이 언니와 나 말고 또 다른 딸이 없는 이상, 그럴 리가 없었다.
엄마는 거짓말을 했다고 고백했다.
"에이~ 엄마, 엄마답지 않게 유치하게 왜 그랬대. 할머니들 모여서 참 할 일 없네."
라고 나는 웃고 말았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처음이었다. 엄마가 속마음을 말한 것이.
11년 전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 엄마는 줄곧 언니와 내게 더 주지 못해 미안해했다. 큰일이 있을 때마다 주머니를 푸는 것은 오히려 엄마였음에도, 한 번도 너희는 왜 이러냐, 저러냐, 자식 탓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 엄마도 동네 할머니들 자식 자랑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다 생각하니 미안했다.
할머니들이 자식 자랑을 할 때면, 자기는 열두 살 사춘기 말 안 듣는 손녀 자랑만 한다는 엄마가 수화기 너머에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예전 같으면 '우리 딸, 기상청 다녀~.'라고 자랑했을 텐데......."
기상청에 입사한 후, 나는 기상청에서 근무한다는 말을 자주 숨겼다. 입사 1년 차에 겪은 일 때문이었다. 급하게 비상근무를 들어가야 해서 택시를 탄 적이 있었다. 목적지를 전해 들은 택시 기사님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내게 하소연을 했다. "아니, 분명히 어제저녁까지는 태풍이 모레 상륙할 거라 하더니, 오늘 아침에는 갑자기 곧 상륙한다 하면 어쩝니까?" 그 뒤로 나는 혹여 택시 탈 일이 있으면 목적지로 회사 근처 건물 이름을 댔다.
"고기압이면 맑고, 저기압이면 비 오는 거 아니야? 그걸 왜 못 맞춰?" 라며 국민학교 시절에나 들어본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상대방을 의자에 앉혀놓고 대기과학 개론부터 대기역학까지 설명할 수 없으니,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기상청에 다닌다는 사실은 비밀이야!'라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기상청 다닌다고 말해봤자, 날씨예보 왜 이렇게 안 맞느냐고 핀잔만 돌아올 텐데...... 그게 뭐가 그리 자랑이라고, 엄마는 그 자랑을 새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엄마는 이제 자랑할 것이 없다. 엄마의 자랑이었던 나는 지금 백수이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는 그렇다.
내가 기상청을 그만두고 나온 이유는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아 살고 싶어서였다. 장난처럼 말하고 다녔으나, 주문처럼 외웠던 내 꿈은 2백만 부 베스트셀러 작가다. 그런데 아직 출간 작가는커녕 작가 등단도 하지 못했다. 엄마와 어울리는 동네 할머니들 사이에서는 멀쩡한 직장 때려치우고 놀고 있는, 분명한 백수였다.
며칠 전, 친구가 이번 달부터 엄마에게 30만 원씩 드리기로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지금껏 키워준 엄마에게 주는 연금이라고 했다. 그야말로 딸 연금이었다. 딸 연금이라니, 그런 좋은 연금이 어딨어? 나는 물개 박수를 쳤다. 내 친구이지만, 정말 기특했다. "엄마가 정말 뿌듯해하시겠다." 그러고서 생각하니, 우리 엄마 생각이 났다. 괜히 짠했다. 나도 엄마에게 딸 연금을 드리고 싶었다.
기상청에서 나오는 월급으로 드리기는 이미 틀렸으니, 나는 부지런히 글을 쓰기로 한다. 아직 보이는 성과는 없지만, 열심히 차곡차곡 디딤돌을 놓고 있다고 믿으며. 아직 내겐 갈매기 날개조차 없어 보이지만, 혹시 잘 키우면 알바트로스의 날개처럼 자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며. 겨드랑이가 근질거릴 때마다 날개가 돋고 있다 생각한다. 느리지만, 분명히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중이다.
"우리 딸, 베스트셀러 작가야!"
상상하기도 벅찬 그 날이 언제 올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