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버선발로 뛰어나가 당신을 꼬옥 끌어안겠습니다.
TV에서 방영하는 납량특집을 보던 중이었다. 이야기 속 주인공은 매일 밤 꿈속을 찾아오는 죽은 사람 때문에 공포에 떨고 있었다. 옆에 있던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나중에 내 꿈에 나타나지 마. 나, 무서워."
그때는 몰랐다. '죽음'이 아주 먼 이야기처럼만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나와는 무관한 것. 그래서 죽음에 대한 슬픔, 두려움, 그 어떤 감정도 없이 순전히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었다.
아빠는 그때 뭘 하고 계셨던가. 공과금 납부 고지서를 보고 있었던가, 손톱을 깎고 있었던가. 별 대꾸 없이 하던 일을 계속하셨다. 그때 내 나이가 몇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철없던 내가 아빠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는 기억만 또렷할 뿐이다.
꿈에서 가끔 아빠를 본다.
꿈은 늘 엉뚱하게 전개되지만 어떤 장면들은 무척이나 생생하다.
며칠 전 꿈은, 저녁 무렵 아빠와 함께 퇴근하는 장면에서 시작했다. 자동차를 어디에 주차해 두었는지 생각나지 않아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도 기억나지 않는 눈치다. 문득, 한 장소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다. 아빠에게 묻는다. "위에 뒀나?" 아빠가 '그런가?' 하는 반응을 보인다. 그 순간 '위에 뒀나'라는 말을 아빠가 이해했다는 사실에 신이 난다. 우리들만의 은어를 알아들은 걸로 보아, 꿈속의 아빠가 진짜 아빠인 것 같아서 마음이 벅찬다.
'위에 뒀나'에서 '위'는 아빠 과수원 '2층 뒤편'을 말한다. 여기서 '2층'이란 과수원 한복판에 지어진 집, 본건물의 대각선 위쪽 언덕배기에 아빠가 지어놓은 가건물이다. 방이 2칸, 거실, 부엌이 있는 공간인데 우리는 그곳을 2층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2층의 뒤편에는 과수원 중앙을 가로지르는 길이 시작되는데, 가끔 이런저런 이유로 집 앞마당이 복잡할 때면 '2층 뒤편'에 자동차를 주차하곤 했었다. 그것을 가리켜 우리는 '위에 뒀다'라 표현했다.
자동차를 찾아, 아빠와 걷는다. 앞마당에 철쭉이 핀 전통찻집을 지난다. 비탈길을 오르는데 아빠가 다리를 절뚝거린다. 왼쪽 무릎이 아프신 모양이다. 무릎에서 발로 시선이 옮겨지고, 다음은 발을 향해 클로즈업된다. 마치 코앞까지 고개를 숙여 아빠의 구두를 들여다보는 것 같다. 까만 구두가 오래돼 보인다. 가죽이 낡고 가장자리가 해졌다. 새 구두를 한 켤레 사드려야겠다 생각한다. 동시에 어젯밤 (실제) 인터넷 쇼핑으로 질러버린 백팩이 떠오른다. 주문을 취소해야지, 그 돈으로 아빠 구두를 사드려야겠다 생각한다. 갑자기 장면이 바뀐다. 자동차를 찾았다. 아빠가 보조석에 타고 있다. 우리는 어딘가로 가고 있다. 창밖은 희뿌연 안개가 가득하고 날씨가 춥다. 문득 엉뜨(자동차 시트의 열선, 엉덩이가 뜨거워진다 하여 '엉뜨')를 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엉뜨를 켠다. 아빠 조금만 기다려, 곧 따뜻해질 거야.
어떤 꿈속에서 나는 아빠에게 무언가 해주지 못한 것에 한이 맺힌 사람이다. 아빠가 살아계실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들, 예를 들면 어느 날 꿈에는 아빠 방에 걸려 있는 허름한 잠옷을 보고서 '좋은 잠옷 한 벌 사드려야겠다' 생각한다. 당장 사드리고 싶어 견딜 수 없이 조급해지는 마음이, 어쩐지 서글프다.
어떤 날에는 '아빠가 살아 계신다'는 꿈속 설정에 심취한다. 당장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기만 하면 아빠와 통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한 듯 기뻐하다가, 문득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다. 어, 이상하네. 아빠가 살아 계셨던가? 동시에 잠에서 깬다. 아빠가 내 곁에 살아 계시던 세계와, 내 곁에 없는 세계 사이에서 비몽사몽…… 나는 찰나의 혼란을 경험한다.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 애당초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의 꿈에 나타날 수 있을까? 살아 있는 자의 기억, 무의식이 만들어낸 허상이 아닌, 정말로 죽은 자의 영혼이 산 자의 꿈속에 찾아올 수 있는 걸까?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다.
나의 아빠의 아빠는, 돌아가신 후 아들의 꿈에 종종 나타나셨다. 할아버지, 그러니까 나에게 할아버지인 아빠의 아빠 꿈을 꾼 날이면 아빠는 언니와 내게 당부를 했다.
"어제 꿈에 할아버지가 나왔다. 오늘 차 조심해라."
할아버지는 아빠에게 무언가를 경고해 주려고 애써 찾아오신 걸까?
나는 꿈속에 나타난 아빠가 진짜 아빠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그저 내 기억의 잔재이거나, 아빠를 그리워하는 내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이라 여겼다. 그런데 딱 한 번, 올해 2024년의 새해 첫날 꿈이었다. 아빠의 정확한 대사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사는 게 힘들지? 원래 그런 거다. 우리 막내, 잘하고 있다" 식의 격려의 말을 했더랬다. 꿈속에서 직관적으로 생각하기를 '진짜 아빠가 내 꿈에 찾아왔구나'. 꿈에서 깨자마자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 아빠가 진짜로 내 꿈에 찾아온 것 같아!라고 말하다가 잠에서 깼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이왕이면 꿈속에서 아빠를 자주 만나고 싶다. 무서우니까 내 꿈에 나타나지 말라던 막내딸의 부탁을 무시하고, 더 자주 아빠의 영혼이 내 꿈에 찾아와 주면 좋겠다.
어느 날 엄마와 이런 이야기, 죽은 자의 영혼이 산 사람의 꿈속에 찾아올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는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그럴 수 있는지 없는지는 죽어봐야 알 수 있겠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중에 엄마가 먼저 떠나면 내 꿈에 올 수 있는지 꼭 시험해 봐. 만약에 성공하면, 진짜 엄마 영혼이라는 걸 내가 알아차릴 수 있게 나한테 싸인을 보내. 싸인을 뭐로 정할까? 노란 깃발을 가지고 와서 흔들래? 아니면, '내가 진짜 엄마다.' 하고 속삭일래? 엄마는 그저 장난처럼 호호호 웃어넘긴다. 하하하 웃어넘겼던가. 깔깔깔 웃어넘겼던가.
엄마가 내 곁에 없는 세상, 상상도 하기 싫은 그 세상, 그럼에도 언젠가 내가 맞닥뜨려야 할 세상이 두려워질 때마다 나는 엄마에게 다짐을 받고 싶다.
엄마, 나중에 내 꿈에 맨날 맨날 나타나야 해.
당신이 내 꿈에 찾아온다면…… 나는, 버선발로 뛰어나가 당신을 꼬옥 끌어안겠습니다.
그런 일은 아주 먼 훗날, 멀고도 먼 나중의 일이면 좋겠다. 그러기 이전에 올해 2024년을 마치 2044년, 2054년의 내가 시간을 거슬러 와 있는 듯 살아보려 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버선발로 뛰어나와 꼬옥 끌어안는 심정으로 조금 더 따뜻하게, 더 다정하게 굴고 싶다.
지금 이 순간이 시간을 되돌아와 다시 마주하고 있는 일상이라 상상하면, 당신의 모든 것이 그저 아름답게만 보일 것 같다. 눈앞을 스쳐가는 순간들이 몹시도 소중해서 나는 이 모든 찰나에 그저 감사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