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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막내작가 Oct 06. 2020

바보 이반과 함께 삽니다.

<바보 이반 편> 1. 아무래도 우리, 호구가 된 것 같아.

 친구와 다투고 속상하거나, 회사에서 속 터지는 일을 겪었을 때, 어쩌다 아빠에게 그런 얘기까지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다만, 나는 전화기를 붙잡고 한참을 툴툴거렸다. 철없는 막내딸의 마음이 조금 후련해질 즈음, 환갑을 코앞에 둔 아빠는 말했다.

 "그런데 막내야~ 아빠가 살아보니까, 내가 조금 손해 본다~ 생각하고 사는 게 맞더라."

  일평생 처자식을 위해 바보처럼 주기만 하던 아빠가 떠나자, 바보 이반 같은 남자가 내 곁에 산다.




: 접촉사고가 나서 연락드립니다. 전화를 안 받으셔서 접촉 부분 사진 찍어두고, 일단 이동해야 해서 문자 드립니다. 사고 죄송합니다. 문자 보시면 연락 주세요.


: 네, 확인했습니다. (범퍼를) 야무지게 밀어주셨네요. ㅎㅎㅎㅎ 다른 이상은 없네요. 괜찮습니다.


: 엇.. 보험처리나 따로 합의하거나, 하는 절차 없이 그냥 봐주신다는 말씀이신가요?


: 네. ^^  

 차 소유주가 남편이라... 물어보니, 범퍼는 원래 박으라고 있는 거래요;;; 

 그래도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전 운전하세요~.


: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기분이 좋아지네요. 감사합니다.


: 네, 좋은 일 하기 릴레이 운동 중입니다. 바통 받으셨으니, 누군가에게 또 전해주세요. ^^


: 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



 호구다;;;; 호구도 이런 호구가 없다!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누군가 실수로 긁었다. 연락을 받고, 일단 차주(자동차 주인)인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동차의 파손 정도를 묻는 남편에게 사진을 찍어 보냈다. 잠시 후, 그의 답변은......

 "범퍼는 원래 박으라고 있는 거야. 그냥 넘어가자." 

 나는 잠시 생각했다. 이 녀석이 또 귀찮아서 이러는 건가? 원래 남편은 어딘가에 전화를 하고, 따져 묻고, 처리하고, 마무리하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한 일들을 아주 귀찮아하는 녀석이니까. 그게 아니라면, 내 남편은 바보인가? 이럴 때를 대비해서 들어 놓은 것이 자동차 보험 아닌가. 그냥 보험처리를 하면 깔끔할 텐데, 굳이 손해를 보려는 그가 바보 같아 보였다. 내 차였다면, 어림 반푼 어치도 없는 소리다.

 하지만, 잠시 후 나는 잠자코 차주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차 주인이 그러겠다는데, 뭐 어쩌겠나. 사실, 남편차는 이런저런 이유로 동네북처럼 이미 이곳저곳 긁혀 있기도 했다. 한 곳 더 진하게 긁혔을 뿐이라 생각하자.

 답장을 기다리고 있을 상대방에게 문자를 보내면서, 한 번 더 망설여지긴 했다.

 '이거, 너무 호구 같아 보이지 않을까?'

 호구. 범의 아가리라는 뜻으로, 매우 위태로운 처지나 형편을 이르는 말. 에서 비롯된 바둑 용어가, 어수룩하여 이용하기 좋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맞다. 호구다. 에라, 모르겠다!


 남편의 롤 모델은 '바보 이반'이다. 러시아에서 전해오는 민간 동화를 1886년에 톨스토이가 재구성해 발표했다는 단편소설 「바보 이반」에 나오는, 그 바보 말이다. 사람들이 닮고 싶은 연예인이나 존경하는 누군가를 동경하듯이 남편은 바보 이반을 동경한다.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이반의 바보스러움이 선하고 아름답다 생각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흔히 현명하다, 똑똑하다, 야무지다 말하는 것들과 거리를 두고 싶어 한다. 오백 원 짜리 동전 하나를 쥐고 있는 남편에게, 누군가 다가와 백 원짜리 동전 두 개와 바꾸자 말하면 바꿔줄 것 같은 사람. "오늘, 오백 원이 꼭 필요한 사람을 만나서 내가 이백 원이랑 바꿔줬어."라고 말할 것 같은 남자. 2020년의 바보 이반이 내 곁에 산다.


 희한한 것은, 그의 바보스러움이 자꾸 내게 전염된다는 거다. 짜증을 내야 할 일 앞에서, 실실 웃음이 날 때가 있다. 뭔가 큰 손해를 본 것 같은 일에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때가 있다. 아득바득 내 것을 챙기려 하지 않아 좋다. 두 손 가득 쥐고 있으려고 애쓰지 않아 좋다. 알면서 속아주는 재미를, 몰라서 행복한 것들을 배우고 있다. 혹여,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괜찮을 것 같다. 그가 추구하는 삶이 분명, 선하고 아름답다는 믿음이 자라기 시작했다. 바보 이반처럼 웃는 남자 옆에 있으니, 나도 웃음이 난다. 그래서 지금 내가 느끼는 것들이 아마도 행복이겠거니 생각한다.


 남편의 차를 볼 때마다, 어디서 왼쪽 뺨을 사정없이 갈겨 맞고 온 자식 같아 속이 쓰리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호구 같은 행동에 누군가 기분이 좋아졌단다. 우리의 바보 같은 운동에 꼭 동참하겠단다. 그러니, 남편은 어쩌면 천재일지도 모른다. 서서히 바보 바이러스를 세상에 퍼트리는, 그래서 바보 이반의 나라를 만들어가려는 엄청난 전략일지도 모르겠다. 이 똑똑한 남자를 나는 열렬히 지지하지 않을 수 없다!



남편의 차는 야무지게 긁혔다. 덕분에 그가 추구하는 바보 이반의 행복한 나라가 한 걸음 더 넓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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