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막내작가 Oct 22. 2020

천사와 악마를 오가던, 내 언니

<버터후라이아짐 편> 1.

 언니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 오랫동안 바뀌지 않았다. 하얀 눈밭에서 눈을 만지며 카메라를 바라보는 유치원 시절의 언니가, 1년이 지나도록 프로필에 올라와 있다. 시시때때로 프로필 사진을 바꾸는 나와 달리, 무심한 듯 놔두는 게 언니의 성향임을 감안하더라도 이번엔 좀 오래간다.




 내 휴대전화기에 등록된 언니의 이름은 「버터후라이아짐」 이다. 그것을 본 조카가, 하루는 제 엄마의 별명이 궁금했는지 내게 물었다.

 "이모! 왜 엄마 이름이 버터후라이아짐이야?"

 "응, 예전에 나비축제에 놀러를 갔는데, 거기에 커다란 나비 동상이 서 있었어. 너네 엄마가 동상 앞에서 웃긴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어달라는 거야. 그때 동상 앞에 적혀 있던 이름이 '나비'를 영어로 한 '버터플라이(Butterfly)'였어. 버터플라이 앞에 서 있는 아줌마라고 놀리면서 '버터후라이아짐'이라고 이모가 지었어. 그냥 말장난이었는데, 이모는 왠지 그 이름이 마음에 들더라."

 그 후 아주 오랫동안, 나는 언니를 버터후라이아짐이라 부르고 있다.


 언니가 버터후라이아짐이 되기 훨씬 이전, 어린 시절의 언니는 내게 천사였다.

 나와 3년 터울인 언니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해, 나는 언니와 같은 학교 2학년이었다. 추운 겨울, 하루는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곧장 언니가 있는 5학년 교실로 갔다. 교실 앞문을 빼꼼히 열고서 언니를 찾았다. 나를 먼저 발견한 언니가 교실문 밖으로 나왔다.

 "왜? 무슨 일이야?"

 "언니~~~ 나, 실내화 안 가져왔어."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내가 생각해도, 참 어이없는 나였다.

 그런데 언니는 대뜸, 신고 있던 실내화를 벗었다. 발뒤꿈치까지 감싸는 빨간색 털실내화를 내게 주었다.

 "언니 꺼 신고 가."

 언니는 군소리 없이 자기 실내화를 벗어주었고, 나는 군소리 없이 그것을 받아 신고 2학년 교실로 돌아왔다. 그때, 언니에게 고맙다는 말은 했었던가? 잘 모르겠다. 그저 기억나는 것은 빨간색 털실내화 발등에 파란 줄무늬가 그려져 있었다는 것과, 실내화 속으로 발을 집어넣었을 때 느껴졌던 언니의 따뜻한 체온이다.

 언니라고 해봤자, 고작 3년 차이인데... 그래 봤자 초등학생 5학년이었는데... 언니는 동생에게 털실내화를 벗어주고서, 하루 종일 차가운 마룻바닥을 어떻게 견뎠을까. 빨간 털실내화 사건은, 내게 언니가 천사 같은 존재였음을 증거 하는 생생한 기억이다.


 천사가 악마가 되기까지는 약 4~5년이 걸렸다. 언니는 고등학생이 되고,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무르익은 사춘기와 햇 사춘기가 만났다. 전쟁이었다. 나를 쏘아보는 언니의 눈빛에서 레이저가 나왔고, 말 그대로 우리는 눈만 마주치면 싸웠다. 동생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언니와, 언니에게 기를 쓰고 대드는 동생이었다.

 그러다 언니가 대학생이 되자, 더 이상 싸울 일이 없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싸울 기회가 적었다. 얼굴을 마주 볼 시간이 급격히 줄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20대의 황금기(20~24세)를 각자 보냈다. 지금 와서 뒤돌아보면, 나는 그 시절이 참 아쉽다. 지금도 가끔, 친구처럼 붙어 다니는 20대 초반의 자매들을 보면 부럽다. 훌쩍 건너뛰어버린 나와 언니의 시절이 떠올라 후회가 된다.


 우리가 다시 가까워진 건 언니가 결혼을 한 후였다. 조카들이 태어나면서 언니와 나는 부쩍 붙어 다녔다. 그 후 10년이 넘게,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언니와 나 사이에 여전히 구멍 난 시간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여름날, 조카들이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는 워터파크 야외풀장 옆 파라솔 아래에서... 마주 앉아 있던 언니가 눈물을 흘렸다. 소시지와 맥주잔을 앞에 두고서, 그날 언니는 처음으로 내게 '힘들다.'는 얘기를 꺼냈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말해주지 않았고, 나도 묻지 못했지만, 새까맣게 타버린 언니의 마음은 알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언니에게도 나름의 힘듦이 있을 테고, 동생이라서 더 꺼내기 힘든 이야기들이 있을 거라는 짐작 정도였다.

 시간이 흘러 조카들이 훌쩍 자라고 나도 결혼을 하자, 우리는 자주 만나지 못했다.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고, 올해는 코로나 19로 얼굴 보기가 더 힘들었다. 그사이 언니와 내가 서로 말하지 못한 이야기, 들어주지 못한 이야기들이 자꾸만 더 쌓여가고 있는 건 아닌지......

 

 눈밭에 앉아 있는 언니가 외로워 보인다. 자그마한 몸이 더 안쓰러워 보인다. 내가 건너뛰어버린 시간 속에서 언니가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는 것 같다. 함께 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따뜻하게 살펴주지 못한 것이 후회가 돼서, 나는 괜히 언니에게 프로필 사진을 바꾸자고 졸랐다. 하지만 오늘도 언니의 프로필 사진은 그대로다. 혹시, 이 글을 언니가 읽게 된다면 언니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야~~~ 그거, 그냥 귀찮아서 안 바꾼 거야."



매거진의 이전글 알록달록 사탕 때문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