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FJ형 성격 탓을 해본다.
비상계단에 누군가 자전거를 놓아두기 시작했다. A층과 B층 사이 계단에 한 대, C층 계단 입구에 한 대였다. 두 대의 자전거가 자주 목격된 지 두 달이 되어갈 무렵, 관리사무소에 이 사실을 알렸다. 다음 날, 자전거에 메모지가 한 장씩 붙었다. 자전거를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는 안내문이었다. 하지만 안내문의 효력은 제로였다. 이후로도 C층의 자전거는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A와 B층 사이의 자전거는 메모지도 떼지 않고, 한 달이 더 지나도록 같은 자리를 고집스럽게 지켰다.
비상대피로에 물건을 놔두는 것은 불법이다.
「화재예방, 소방시설 설치 ·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이하 소방시설법)」 제10조 1에 의하면,
"피난시설, 방화구획 및 방화시설의 주위에 물건을 쌓아두거나 장애물을 설치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 위반 시, 제53조에 의해 3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다.
> https://www.law.go.kr/법령/화재예방,소방시설설치ㆍ유지및안전관리에관한법률
일주일 전부터 고민했다. 그냥 모른 체할지, 아는 체할지. 마음이 시소를 탔다.
비상통로에 무언가를 두는 행위는 평소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위급한 상황에서는 누군가의 대피에 방해가 되거나 적치물 때문에 다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잘못된 건 바로잡아야 한다는 생각. 다른 한편으로는, 자전거 보관소가 따로 있긴 하지만 저녁이면 가득 찼다. 빈자리가 없을 때가 많고, 그렇다고 자전거를 집안에 두기엔 현관이 좁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자전거를 비상계단에 두었을 것이다.
사실, 자전거가 사람들의 통행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눈감아주자면, 눈감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왜 자전거들이 자꾸 눈에 거슬릴까?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아 하는데, 내가 유난스러운 건가? 고민의 화살이 나를 향했다. 하룻밤을 더 고민했다.
그래도 눈은 못 감아주겠다.
C층 자전거가 잠시 출타 중인 틈을 타, 이곳에 자전거를 놓지 말아 달라는 글을 A4 종이에 적어서 벽에 붙였다. A~B층 사이 자전거는 신고를 했다. 119 안전신고센터(www.119.go.kr) 홈페이지에 신고글을 올리고서 1분이 지나지 않아 119 센터로부터 전화가 왔다. 신고인이 맞는지, 주소와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곧이어 출동한다는 문자가 왔다. 그리고 약 3분 후, 출동 중인 소방대원에게 전화가 왔다. 일사천리로 일이...... 커졌다.
신고결과는 이렇다.
: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 강제로 자전거를 치우게 할 방법은 없다고 한다. 과태료 부과 대상은 자전거 주인이 아닌, 법령에 명시된 '특정 소방대상물의 관계인', 소방대상물의 관리인인 관리사무소였다. '자전거를 다른 곳으로 치울 수 있도록 조치하라.'는 시정보완명령이 관리사무소에 내려졌다. 그날 저녁, 비상계단 자전거에 대한 안내방송이 두 차례 나가고, 각 세대로 공지문이 날아왔다.
한바탕 소동이 끝나자, 알 수 없는 찝찝한 마음이 남았다. 괜한 짓을 한 것 같았다. 이미 한 짓을 후회하느라,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저녁 내내 남편 주위를 배회했다. 보다 못한 남편이 말했다. 유난스러운 게 아니라, 정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정의라고 믿는 것들이 흐트러지는 모습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그렇다고.
'아! 그래, 나는 선의의 옹호자였지!'
탓할 곳이 생겼다.
사람의 성격을 분석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 대중적으로 알려진 마이어스-브릭스 유형 지표(Myers-Briggs Type Indicator, MBTI)가 있다. 60개의 질문을 통해 응답자의 성격을 16가지 유형으로 분석한다. 재미 삼아 몇 번 해보았는데, 나는 INFJ형(선의의 옹호자) 유형이 나왔다. 물론 이 방법이 100% 과학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선의의 옹호자 유형을 설명하는 여러 글들을 읽으면서 "맞아, 맞아!"를 연발했다. 심지어 내 마음을 대변해주는 글을 읽고 있는 것 같아, 쓸데없는 위로까지 받았다. 그런 INFJ형의 특성 중, 남편이 말한 '내 성격'이란 아마도 이런 걸 의미했을 것이다.
사회적 불의에 민감하다. 도덕관념이 높고 정의롭다.
크든 작든 세상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자 하는데 이들보다 열심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내버스의 주 고객이었던 고등학생 시절, 나는 시내버스 기사님에 대한 불편신고 엽서와 칭찬엽서를 자주 빼들었다. 그 얘기를 전해 들은 내 친구의 어머니는 "그렇게 행동하는 게 맞다." 고 해주셨더랬다.
내가 세일러문("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를 외치던 애니메이션 주인공)으로 변신하느라 푸드닥 거리는 모습을 4년째 봐 온 남편은, 세상에는 나 같은 사람도 꼭 필요한 거라고 위로해준다.
덕분에 나는 내가 유난스러운 것만은 아니라고, 조금은 안도했다.
하지만 가끔, 내가 옳다고 믿는 것들이 정말 옳은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비상통로에 자전거를 두는 것이 절대 허용할 수 없는 큰 잘못일까? 그랬다면 아마도 내가 신고한 자전거의 주인은 바로 체포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는 용납될 수 있는 부분이기에, 법도 말랑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내 성격도 조금은 말랑해져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유난스럽다고 보일 내 성격 때문에 오늘 누군가는 수고로운 걸음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고생하시는 분들이라, 죄송하다. 또, 매일 밤 누군가는 자전거를 둘 곳이 마땅치 않아 곤란해질 것이다. 심란한 마음에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들어오면서, C층에 붙여놓은 종이를 뗐다.
'그래, 오죽하면 여기에 자전거를 둘까.'
애꿎은 성격 탓을 해보아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이 까슬거린다. 다행인 건, INFJ형 성격의 사람이 전 세계 인구의 1%도 되지 않는단다. 그 말이 사실이길 바란다. 나 같은 사람들이 흔하지 않아서, 세상이 조금 덜 팍팍하고 덜 피곤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웬만하면 비상통로에 자전거를 두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모두가 기본은 지켰으면 좋겠단 고집을 꺾진 못하겠다. ㅡ_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