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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막내작가 Dec 03. 2020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엉뚱함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제목이 탐나서 ^^;

 "우리 애들은 싸우지도 않아. 사이가 너무 좋아."

 "뭐래~~~ 한 놈은 동생이 주운 돌을 뺏겠다고, 한 놈은 오빠한테 안 뺏기려고 악을 쓰고 있는데."

 "헐......"


 언니와 9년 전 사진을 보다가 나눈 대화다. 40대 중반에 노안이 시작된 언니의 눈에는 사진 속 아이들의 표정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돌멩이 하나를 가지고 서로 아옹다옹하다가, 결국 둘째 조카가 울음을 터트리는 순간에 찍은 사진이었다. 언니는 두 녀석의 실루엣만 보고서 푸른 잔디밭에서 뛰놀고 있는 사이좋은 오누이라 생각했으니, 이를 어째;;;

  

 엉뚱함을 무기로, 나로 하여금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존재들이 있다.

 언니와 조카들이 대표적인데, 그 엉뚱함이란 이런 식이다.



 "아~ 배고파! 얼른 짜장면 시키자!"

 밥때를 넘긴 저녁, 집에 돌아온 언니가 외투를 벗기도 전에 서둘러 114에 전화를 건다.

 (당시만 해도 가게에서 받아둔 손바닥만 한 메뉴판이 없으면, 114에 전화를 걸어 근처 가게의 전화번호를 알아내던 시절이었다.)

 삐리리--------

 "안녕하십니까?"

 "네, 여기 00동 000-00번지인데요, 짜장면 2개만 가져다주세요."

 "...... 네? 고객님? 여기 114인데요."

 "..... 네?!"

 헉!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한 단계를 건너뛰어버렸다.



 "이모! 헌혈이가 누구야?"

 "...... 응?"

 "길가에 지나가다 보면 「헌혈의 집」이라고 있던데, 헌혈이가 누구길래 그래?"

 헉!

 ......(헌혈의 집에 대해 설명하는 중)......

 "아~~~ 난 또, 헌혈이가 사람 이름인 줄 알았네."



 "이모~~~ 왜 사람들은 배꼽처럼 하얗다고 해?"

 "...... 응?"

 "어떤 말을 할 때, 배꼽처럼 하얗다고 그러잖아. 배꼽이 왜 하얘?"

 헉!

 '백옥일 거야......'


(조카가 한창 말을 배우던 시절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배꼽 잡을 에피소드들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 기록해두었다면 어록집 하나는 나왔을 텐데, 아쉽다.)


 체코 출신의 작가, 밀란 쿤데라가 1984년에 발표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란 책을 나는 2020년이 되어서야 제목이 매력적이라는 이유로 펼쳐 들었다.

 곧바로 처음 다섯 페이지에서 랙(lag)이 걸렸다.

 '이건 도무지 무슨 말인가......?'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갈길을 잃고, 왔던 길을 자꾸 되돌아갔다. 글자를 읽고도 뜻을 알 수 없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 여기서 잠깐 삼천포로 빠진다.

 : 본 글을 발행한 지 9일이 지났다.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어서 글을 추가한다. 며칠 전에 문득 든 생각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갈길을 잃고, 왔던 길을 자꾸 되돌아갔다."는 표현을 아무런 의심 없이 내가 쓴 문장이라 생각했었는데, 어디선가 읽었던 문장이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다. 가지고 있는 책들을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하지만 한 번 든 의구심은 점점 커졌다. 나도 모르게 표절을 한 건 아닐지... 글을 쓰는 사람들이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 의식하지 못한 채 표절하는 것. 읽었던 책들을 대부분 친정집에 가져다 둔 터라, 표현의 출처를 찾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결과에 대해서 추후 분명하게 밝히겠다.)


 혹시 이 책을 읽어보고자 하는 분들에게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처음 다섯 페이지는 몇 글자로 구성되어 있는지 글자 수를 세어보는 것에 만족하며 읽기를 권한다. 다음 페이지인 1부의 3장부터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다가,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은 후,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미궁에 빠져 있던 다섯 페이지를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글자의 의미뿐 아니라,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훨씬 도움이 될 것 같다.

 사실 나는 첫 다섯 페이지뿐 아니라, 516페이지의 책을 읽는 내내 자주 버벅거렸다. 그럼에도 삶의 중요한 명제들에 대해 재해석해놓은 명쾌한 문장들을 읽을 때면, 무릎을 탁! 쳤다. 밀란 쿤데라는 천재가 아닐까, 감탄하며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내용만큼이나 명작이라 생각하는 책의 제목에 빗대어, 오늘 써 내려간 이야기를 표현해보려 한다.

 나로 하여금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그들의 엉뚱함이야말로 말할 수 없이 가벼운 에피소드들이다. 그런데 그 가벼운 것들은, 가끔 내 마음에 묵직한 추를 달아준다. 어디론가 흩어져 날아가버릴 것 같은 싱숭생숭한 마음이 차분히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그런 에피소드들을 잘 기억해두려고 애쓴다. 지친 어느 날 꺼내보고 한바탕 웃고 나면,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문제들이 몇 조각 떨어져 나간 것 같다. 가볍다 여기는 것들이 꼭 가볍지만은 않고, 무겁다 느끼던 것들이 꼭 무겁지만도 않은 것이 삶인 것 같다고 또 한 번 깨닫는다. 


 2020년 12월 3일, 오늘은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수능시험을 치른 지 20년도 더 되었지만, 그날의 기분은 잊을 수가 없다. 초·중·고등학교를 합쳐 12년을 달려온 것에 비하면, 반나절도 되지 않아 끝나버린 시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벼웠다. 그래서 허망했다. 그 가벼운 것에 앞으로의 인생이 모조리 결정될 것만 같아, 열아홉 살의 마음이 세상을 다 산 듯 무거웠다. 하지만 열아홉이 지나고 마흔을 지나 보니, 그날의 무거움은 그저 한없이 가벼운 것으로 바꿔버려도 좋았을 것이었다. 열아홉의 나는 그럴만한 마음의 힘이 없어서 밤잠을 설쳤다.

 오늘 큰 일을 해낸 수험생들이 두 발 쭉 뻗고 잠들 수 있는 밤이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조금 더 가볍게 살아도 좋을 존재들이라는 것을, 열아홉의 마음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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