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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막내작가 Feb 10. 2021

소금만 찍어 드세요.

: 시오 다케 톳데 오메시아가리 쿠다사이.

 돈가스에 대한 첫 기억은 초등학교 시절 「유생촌」 이란 경양식집에서였다. '돈가스=유생촌'이란 식이 성립할 정도로 우리 동네에서는 나름 유명한 곳이었는데, 생일, 졸업식 같은 특별한 날에 갈 수 있었다. 그곳의 돈가스 맛이 어땠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돈가스 이외의 것들만 생생하게 기억난다. 식전에 나오는 희멀건 수프의 고소하고 짭조름한 맛. 곧이어 하얗고 커다란 접시 한가운데 먹음직스럽게 소스가 뿌려진 돈가스와, 그 주변을 통조림에서 건져 올린 알록달록한 과일 조각들, 마요네즈로 버무린 샐러드 한 소쿱, 브로콜리와 당근으로 추정되는 몇 조각의 야채가 둘러싼 모습. 그보다 작은 흰 접시에 얇게 펴서 붙여놓은 것 같은 쌀밥이 나왔다. (밥을 미리 담아놓은 접시들이 층층이 쌓여있는 모습은 조금 충격적이었다. 어쨌건...) 반짝이는 나이프와 포크, 그리고 새하얀 천으로 된 냅킨을 두르며 '아! 나 이제 돈가스 먹는다!'는 사실을 실감했고, 가게 안에서 퍼지는 돈가스의 냄새만으로도 황홀했다.


 이후로 돈가스, 돈까스, 돈카츠, 표기법만큼이나 다양한 돈가스들을 먹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를수록 돈가스에 대한 기대와 만족도는 떨어졌다. 대학생 시절 학생식당 점심메뉴로 나온, 고기의 수분이 몽땅 날아가 말라빠진 돈가스는 최악이었고, 호프집 '아무거나' 안주 세트에 끼워져 있던 작은 조각의 돈가스, 대학교 후문 맛집에서 먹은 왕돈가스 등, 어째서인지 돈가스들은 점점 후퇴하는 것 같았다. 돈가스에 설레던 나이가 지나고, 돈가스가 귀한 대접을 받던 시절도 지났다. 다 기억할 수도 없는 돈가스들을 흔하게 먹었고, 더 이상 돈가스에 감흥이 없었다.


 그러던 3년 전, 우연한 기회에 돈카츠의 나라에서 돈가스를 먹게 되었다. 처음부터 돈가스를 먹어봐야지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당초 계획은 지하철을 한 시간 가량 타고 숙소가 있는 '긴자'로 돌아가 저녁을 먹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정이 늦어지는 바람에 저녁식사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에서야 지하철역을 향해 걷고 있었다. 40도가 넘는 폭염이 일본 도쿄를 뒤덮던 여름날, 도쿄에 인접한 지바현 외곽의 가시와노하 공원 근처에서 더위와 배고픔을 피하기 위해 눈에 띄는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마침 그곳이 '돈가스계의 큰아들', '으뜸 돈가스' 즈음될 것 같은 돈가스 전문 식당이었다. 로스 가스와 히레 가스를 주문했고, 잠시 후 주문한 돈가스를 들고 온 직원이 돈가스를 식탁 위에 내려놓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먼저, 소금만 찍어서 드셔 보세요."

 익숙한 소스를 뒤로하고, 갓 튀겨 나온 돈가스 한 조각을 집어 들어 소금을 살짝 찍었다. 그리고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우와...! 이럴 수가!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동안 30년 넘게 먹어오던 숱한 돈가스들에게서 배신감을 느꼈다고 해야 할까? 돈가스의 참맛을 찾았다고 할까?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취향입니다..)

 그때까지 나는 소스를 찍지 않은 돈가스를 상상해보지 못했다. 소금을 살짝 곁들인 돈가스 본연의 맛은 담백했고, 그 어떤 소스를 곁들인 것보다도 풍성했다. 군더더기를 뺀 본연의 맛은 정직하고 담백하며 깊이가 있었다. 전제조건은 제대로 만들어진 것이어야 했다. 화려한 소스에 뒤범벅되지 않아도 자신 있을 맛.

「Katsutaro」 409-132 Toyofuta, Kashiwa, Chiba

 이후, 한국에 돌아와 돈가스 튀기기에 몇 번 도전해보았다. 분명 신선한 재료로 레시피에 맞춰 만드는데, 튀겨 나온 돈가스들은 엉망이었다. 기름기를 잔뜩 머금고 나오거나, 반대로 입안이 헐 정도로 딱딱하거나. 잘 만들고 싶은 마음은 진심인데, 마음처럼 잘 튀겨지지 않았다. 진심만으로는 되지 않는 일이 돈가스였구나.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 내 돈가스를 제대로 튀겨낼 수 있을까?

 

 화려하게 꾸미지 않은 누군가의 수수한 얼굴이 빛나 보일 때, 수북하게 쌓인 옷장을 탈탈 털어내고 손이 자주 가는 몇 벌의 옷만 걸어놓고 싶을 때, 신박한 가전제품과 편리한 살림살이들로 들어찬 큰 집보다 미니멀한 작은 집의 공간이 더 여유로워 보일 때, 요란스럽게 맞장구치지 않아도 가만히 끄덕이는 고갯짓이 더 좋을 때, 수식어구를 뒤집어쓰지 않은 담백한 문장이 마음에 더 와 닿을 때, 기교 없이 써 내려간 이야기에서 깊이가 느껴질 때, 나는 그날의 돈가스를 떠올린다. 내 삶에서 튀겨질 또 다른 돈가스들을 그렇게 담백하게, 깊이 있게 잘 만들어내고 싶어서 나는 오늘도 돈가스를 튀긴다.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의 돈가스에도 소금만 찍어 드셔 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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