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험하기 전에는 결코 이해하지 못했던 누군가의 두려움
"사람이 하늘을 난다."
이 짧은 문장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당연시 여겼던 사실에 문득 의문이 생긴다. 사람이 하늘을 난다니. 더구나 200톤이 넘는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난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비행기의 무게는 그것을 측정할 기계가 없어서 각 부품의 무게를 합하여 총무게를 측정한다고 한다. 그 거대한 물체가 몇 백 명의 사람들을 태우는 것으로 모자라, 그보다 더 무거운 짐까지 싣고서 하늘을 난다. 가장 큰 여객기의 경우 이륙 시 총무게가 약 380톤이라니, 애당초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내 첫 비행은 날씨가 매우 좋지 않던 6월 말, 여름이었다. 한낮부터 하늘이 시커멓게 변하더니, 거센 비가 쏟아지고 천둥번개가 쳤다. 내가 타고 있던 비행기가 공중에서 벼락을 맞았다. 기내 조명이 일제히 꺼지더니, 이내 다시 켜졌다. 곧바로 기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 우리 비행기가 벼락에 맞았지만, 다행히 기체에는 이상이 없으니 안심하라는 안내방송이었다. 하지만 비행기는 난기류 속에서 심하게 흔들렸고, 갑자기 공중에서 뚝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순식간이었지만 그 느낌이 어찌나 강렬하던지, 배꼽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거칠고 요란한 첫 비행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비행기가 두렵지 않았다.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인류의 역사를 바꾼 소수의 천재들이 발명하여, 백 년 넘게 발전을 거듭해온 최첨단 교통수단이라는 믿음. 나를 안전하게 땅 위에 내려줄 거라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은 꽤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던 몇 년 전, 나는 보라(Bora)를 만났다. 대기과학 개론 책에 단 몇 줄로 소개되어 있는 바람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고, 그 날 이후 최첨단 교통수단에 대한 믿음은 산산조각이 났다.
보라(Bora)는 지형에 의해 만들어진 국지풍(특정 지역에서만 부는 바람)으로, 높은 지대에서 낮은 지대를 향해 활강하는(미끄러져 내리는) 강한 바람이다. 발칸반도의 서쪽 끝, 아드리아해를 사이에 두고 이탈리아와 마주하고 있는 크로아티아 지역에는 이 바람이 자주 분다. 겨울철이면 시속 200km가 넘는 바람이 심심치 않게 관측되고, 몇 년 전에는 시속 300km(초속 80m가 넘는다;;)가 넘는 순간 풍속이 기록되기도 했단다. 구글에서 "bora wind"를 검색하면 크로아티아 해안에서 찍은 동영상들이 나오는 걸, 그땐 몰랐었다. 그래서 겨울이 채 끝나기 전인 3월 초, 나는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서 두브로브니크(크로아티아의 가장 남쪽에 있는 해안도시)로 향하는 항공편에 겁 없이 몸을 실었다.
* 짙은 녹색지역이 크로아티아, 붉은색 화살표는 지상에서 10m 고도의 바람이다. 보라색 선으로 비행경로(자그레브→두브로브니크)를 추가했다.
겨울철 이 지역에는 기압 차이에 의해 바람이 주로 육지에서 바다로 불어나가는데, 육지는 대부분 고도가 높은 산악지대이다. 해발고도 2,692m에 이르는 디나르 알프스(Dinarsko) 산맥이 아드리아해 연안을 따라 645km가량 늘어서 있다. 그곳에서 겨울 내내 차갑게 냉각된 공기 덩이가 해안가에 다다르면, 아드리아해를 향해 높은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꼴이다. 그렇지 않아도 찬 공기는 밀도가 높아 무거운데,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내려오니 그 속도와 세기가 가히 대단하다. 책에 이름을 올릴만하다.
비행기가 이륙한 지 30여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보라(Bora)가 불어왔다. 해안선에 평행하게 날아가고 있는 비행기의 왼쪽 옆구리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비행기는 곧 중심을 잃고 추락할 것처럼 좌우상하 방향 없이 흔들렸다. 바람에 팔랑이는 낙엽처럼 아슬아슬한 비행은 20여분 더 이어졌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있는 비행기가 착륙을 위해 고도를 서서히 낮췄다. 그럴수록 비행기는 더 심하게 요동쳤다. 기체의 흔들림에 맞춰 비행기 안에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함성이 터져 나왔다. 공포의 함성이었다. 잠시 후, 엄청난 흔들림과 함께 창밖으로 활주로가 보였다. '가까이... 조금만 더 가까이!!' 이제 바퀴만 닿으면 될 것 같은 긴박한 순간, 갑자기 비행기가 빠른 속도로 고도를 높였다. 기장의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뭔가 다급하고 긴장한 목소리 뒤로 '실패했다.'는 단어가 들렸다. 이어, 한 번 더 착륙 시도를 해보겠다고 했다. 비행기가 아드리아해 상공에 커다란 원을 그리며 돌더니, 다시 고도를 낮췄다. 또 한 번 어마어마한 흔들림이 찾아왔다. 다행히(?) 기장은 두 번째 착륙 시도를 빠르게 포기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향해 내려가는가 싶더니, 금세 고도를 높여 방향을 틀었다. 기장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대충 끼워 맞춰 보자면, 다음과 같다.
"승객 여러분, 아... 안타깝다. 두 번이나 착륙 시도를 했지만, 너무 위험해서 불가능하다.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 회항을 결정했다. 인근 공항에 착륙할 예정이다. 유감스럽다. 쏘리."
비행기는 30분 후 인근 도시의 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비행기 바퀴가 활주로에 닿고서 10초가량이 지나자, 비행기 안에서 일제히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1시간 30여분 간의 '공포의 비행'이 끝났다. 승객들은 항공사에서 제공해준 대형버스 3대에 나눠 타고 4시간을 달려 원래의 목적지인 두브로브니크에 도착했다. 그날의 기억은 끔찍했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다. '오늘 내 삶이 이렇게 끝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살면서 처음으로 해본 날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날 크로아티아 해안지역의 고속도로는 통행이 모두 통제되고 두브로브니크에는 가장 높은 단계인 강풍경보가 내려졌었다.)
상상해본 적 없는 비행기 공포증이 생겼다.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는 게 무서워서, 가능하다면 그곳에서 불법체류자로 살고 싶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두 번 다시 비행기를 타고 싶지 않았지만, 1년 후 2시간이 안 되는 비행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그날은 날씨가 매우 좋았다. 비행기는 지하철을 탔을 때의 흔들림보다 얌전하게 하늘을 날았다. 그럼에도 내 심장은 아주 미세한 흔들림에도 방망이질을 해댔다. 불안한 마음이 롤러코스터를 탄 듯 오르락내리락거렸다. 보라(Bora)를 만나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었던 공포, 비행기 타는 것이 무섭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그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여전히 비행기 공포증은 내게 극복해야 할 큰 산이다. '흔들림 없는 편안함'은 침대가 아닌, 비행기에 꼭 필요한 옵션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