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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막내작가 Mar 24. 2021

연필의 세계

: 필기구에 진심인 편!

 초등학생 시절 아빠의 권유로 다니기 시작한 서예학원에서는, 학원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먹을 갈았다. 시커먼 벼루에 물(붓을 씻을 때 사용했던 물을 양푼 주전자에 담아두었다)을 부어 먹을 직접 갈았는데, 붓글씨를 배우는 한 시간 중에 15~20분은 먹을 가는데 썼던 것 같다. 먹물이 묽으면 붓글씨가 힘없이 써지고, 먹물이 너무 걸쭉하면 붓의 움직임이 뻣뻣했다. 적정 농도의 먹물을 만들기 위해 한 손에 다 쥐어지지도 않는 큼직한 먹을 붙잡고 부지런히 팔을 돌렸다. 2년 남짓의 경험에 의하자면, 가장 좋은 먹물은 성인반 어른들이 사용하다가 남겨놓고 간 먹물이다. 충분한 양의 먹물이 남아 있는 일은 드물지만, 진득하고 정성스럽게 같은 속도와 같은 힘으로 먹과 벼루를 부딪쳐서 갈아놓은 먹물, 그런 먹물을 붓에 묻혀 종이 위에 글씨를 쓸 때면(사실, 글씨를 썼다기보다 그림을 그리듯 한자를 따라 그렸다) 그어지는 획마다 어찌나 부드럽고 예쁘게 써지는지.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필기구에 진심이 된 것이. 


 필기구에 관심이 많은 나는, 심심하면 문구점에 들러 필기구를 구경하는 것이 취미라면 취미다. 그중 눈에 띄는 신상품은 기어이 지갑을 열고 구매해서 사용해봐야 직성이 풀린다. 학창 시절에는 노트필기 전용 펜을 항상 따로 가지고 다녔고, 그 종류도 대략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시절로 나뉘어 달라졌다. 늘 조금 더 괜찮은 필기구에 목이 말랐기에, 내게 볼펜은 다 같은 볼펜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필기구의 세계는 그 종류와 범위가 너무도 광대해서 여전히 빙산의 일각만 알 뿐이다. 샤프, 볼펜, 펜을 지나... 최근에는 연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잘 사용하지 않던 연필이 손에 자꾸 잡히더라. 가장 뒤늦게 눈을 뜬 연필의 세계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때는 바야흐로 3년 전, 어느 봄날이었다. 카페에서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무언가 떠오르는 생각을 종이에 적어내고 싶었다. 급한 대로 카운터에서 종이와 볼펜을 빌려도 되었을 텐데, 때마침 카페 창문으로 길 건너편에 문구점이 보였다. 연필이 나를 부른 건지, 연필과 내가 그곳에서 만날 운명이었는지, 나는 굳이 문구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무심코 집어 든 연필 한 자루가 바로 독일의 LYRA(리라)사에서 만든 「아트 디자인 669」 모델이었다. 모델명에 이어, 연필 자루 끝에 적힌 'F'. 


 연필의 심은 경도와 농도에 따라 10H에서 12B까지 총 24단계로 나뉜다. 연필심은 흑연과 진흙을 섞어서 구워 만드는데, 흑연과 진흙의 비율에 따라 그 단단함의 정도와 진하기가 달라진다. 

 H는 hardness(단단함)의 약자, B는 blackness(검정)의 약자이다. H 앞의 숫자가 커질수록 연필심이 단단하고 색이 연하다. B 앞의 숫자가 커질수록 연필심이 무르고 색이 진하다(흑연의 비율이 높다).  

그림 출처: 위키백과


 보통은 필기용으로 H, HB, B 이렇게 세 종류가 흔히 쓰인다. 그 외 단계는 그림을 그리거나 설계를 하는 등 조금 더 특수한 용도로 쓰인다. B는 글씨가 부드럽게 써지는 대신, 색이 진해서 쉽게 번진다. H는 글씨가 번지지는 않지만, 색이 연해서 글씨가 흐리멍덩하다. H와 B 사이에 HB가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HB도 색이 진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 줄 알던 지난 세월 동안 나는 대충 HB에 만족하며 살았다. 그런데... 그 사이에... F가 있었다! 

 Firm(견고한, 단단한)의 약자로, 연필심의 단단한 정도는 H와 비슷하고 색의 짙기도 연한 편에 속하는데, 색이 전혀 흐리멍덩하지 않다. 글씨가 또렷하다. 써놓은 글자를 새끼손가락이 문지르고 지나가도 번지지 않는 깔끔함마저 갖췄다. 단단한 연필심이 종이 위를 가볍게 긁고 지나갈 때의 서걱거림! 여기에 맞는 최상의 종이를 만났을 때 손 안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연필 뭐야? 뭐가 이렇게 잘 써져?"

 H와 F사이, 혹은 F와 HB 사이의 절묘한 차이를 느끼지 못한 남편이 말했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잘 써지는 건가?"

※ 네네. 맞습니다. 어디까지나 개인 취양임을 알려드립니다. 참고로 제 남편에게 필기구란, 손에 잡히는 대로, 필통에 꽂혀있는 대로 집어다 쓰는 물건입니다.


 가지고 있는 연필이 몽당연필이 되기 전에 같은 제품을 구매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해당 연필의 가격이 연필계에서는 실로 사치스러운 가격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인터넷 판매를 기준으로 12개 묶음 구매 시 개당 1,500~1,700원, 낱개로 구입 시 약 2,000원이었다. 잠시 놀라긴 했지만, 커피 한 잔 값을 생각해보았다. 가성비가 비교되지 않는다. 이것이 사치라면, 나는 앞으로도 사치를 계속 이어가겠다.


 나는 아직 써보지 못한, 다음으로 써보고 싶은 연필들의 목록을 만들었다. 조만간 구매를 시도할 것이다. 더불어 종이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 힘들이지 않고도 잘 지워지는 지우개를 찾아봐야겠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기술이 상상 이상으로 발전해서 손에 쥐고 있으면 저절로 글이 써지는 연필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헛된 바람을 가져본다. 허허! 이것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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