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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막내작가 May 19. 2021

999cc로 달린 3950일

: 주행거리 250,673km

 내 첫 자동차는 999cc의 경차였다.

 회색 몸체에 5373이란 번호판을 달고 처음 눈앞에 나타나던 날, 나는 첫눈에 반해버렸다. 짧고 동글동글한 보닛, 뒷 유리창에서 범퍼까지 뚝 떨어지는 짜리 몽땅함. 사이미러를 펼치면 마치 작은 귀가 달린 햄스터 같기도 했다. 그 앙증맞은 자태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겨, 급기야 휴대전화 번호 뒷자리까지 자동차 번호와 똑같이 바꾸는 기이한 행동을 했다.

 그렇게 시작된 자동차와의 여정은 3950일 이어졌다. 제주, 군산, 광주, 강릉, 태백, 부산, 경주, 울산, 남해, 여수, 인천, 서울... 전국을 달렸다. 장거리 출퇴근을 하고, 엄마와 여행을 다녔다. 조카들을 태우고, 인사발령이 날 때마다 내 이삿짐을 실었다. 누군가는 "너무 작아서 짐이나 제대로 실을 수 있겠어?"라고 물었지만, 내 자동차는 요술가방처럼 짐을 꾸려 싣는 대로 꾸역꾸역 들어갔다. 부족함이 없었다. 자동차가 있어서 더운 날은 시원했고, 추운 날은 따뜻했다. 어떤 날은 아늑한 위로가 되었고, 캄캄한 밤에는 든든한 보디가드가 되었다.

 물론 고생도 많이 시켰다. 수동 기어(일명 스틱)였던 탓에 처음 한 달 동안 시동을 부지런히 꺼먹었다. 오르막길에서, 사거리 교차로에서, 주차장에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동을 꺼뜨렸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내 손에 길들여진 자동차. 첫 자동차이기도 했지만, 그 작은 공간에서 참 많은 시간을 보냈기에 내겐 특별한 자동차였다. 할 수만 있다면 평생 타고 싶은 자동차. 바람만큼이나 자동차에 정성을 들였다. 동료 직원들 사이에서 00 씨 차는 신발을 벗고 타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돌 정도로, 안팎 할 것 없이 세차를 하고 광을 냈다. 때가 되면 정비소에 데려가 이곳저곳 미리 돈 칠을 한 덕분에, 자동차 정기검사를 받을 때마다 '관리를 잘했다.'라고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 앞에 영원한 것은 없었다. 어느새 자동차는 낡고 녹슬어 있었다. 손에 닿지 않는 부품들까지 닳고 헐거워진 탓에 엔진오일이 조금씩 세고, 급기야 종종 시동을 켜는데 애를 먹었다. 고민 끝에 자동차를 폐차하기로 결정했다. 주행거리 250,673km가 찍히던 날이었다. 나 못지않게 내 자동차를 아껴주었던 아홉 살 둘째 조카가 폐차장에 함께 가주었다. 폐차장에 가는 동안 조카는 이 자동차 덕분에 강원도도 가고, 부산도 가고, 서울도 가고, 제주도도 갔다며 혼자서 추억을 재잘거렸다.

 "자동차야 하늘나라 가서 아프지 마라. 그동안 고마웠어. 스피커야 잘 가. 창문아 잘 가."

 자동차가 하늘나라에 갈 수도, 스피커와 창문이 들을 수도 없을 텐데... 조카는 작별인사를 했다. 

 몇 가지 서류를 작성하고서 자동차를 폐차장 안쪽에 주차했다. 마지막 시동을 끄고서 아쉬운 마음에 핸들을 쓰다듬고 있는 날 바라보며 조카가 말했다.

 "이모가 10년을 잡고 있던 핸들인데......"

 그랬다. 10년이나 붙잡고 있던 핸들을 놓기가 힘들어, 용기를 냈다. 직원분에게 핸들만 떼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날 이상하게 보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내 마음을 이해해주셨다. 뜨거운 땡볕 아래, 내 첫 자동차를 홀로 남겨두고 돌아서는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떼어온 핸들도 무거웠다. 문득 날씨가 이렇게 무더웠었나 싶었다. 마지막까지 자동차 덕분에 나는 무더위 속에서도 시원했구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자꾸 뒤돌아봤다. 엔진으로 움직이는 쇳덩이일 뿐인데, 어쩐지 내 눈에는 쇳덩이가 쇳덩이로 보이지 않았다. 범퍼, 보닛, 헤드라이트, 사이드미러, 뒷모습까지 친근하고 앙증맞은 내 친구였다. 10년 지기 친구는 자신의 고철 값으로 13만 원을 내 통장에 남겨주었다. 마지막까지 아낌없이 주고 갔다. 바로 4년 전, 오늘이었다.


 첫 자동차의 말소등록 4주기인 오늘, 나는 녀석을 본다. 내 노트북 바탕화면에는 녀석의 사진이 띄워져 있다. 폐차하기 이틀 전, 자동차를 위한 기념 여행을 갔다. 그동안 고생한 자동차를 멋진 배경에 세워두고 사진을 찍고 싶었다. 내 자동차에 가장 많이 오른 엄마, 그리고 두 조카 녀석이 함께 해주었다. 어느 해안가 풍력발전소의 터빈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곳에서, 초록 벼를 배경으로 자동차를 세웠다. 엄마는 별 짓을 다 해본다고 웃었다. 조카들은 자동차와 멋진 포즈로 사진을 찍겠다며, 자동차 지붕 위로 올라가 누웠다. 그날에 찍은 사진을 보고 있으면, 내 첫 자동차가 그리워진다. 아쉬운 마음에 떼어온 핸들을 한 번씩 쓰다듬는다. 그리고 여전히 자동차 번호를 따 만든 휴대전화 뒷 번호를 사용한다. 참 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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