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ologue
아침 일찍부터 진료대기실에 사람들이 많았다.
벽에 걸린 모니터를 통해 진료실마다 대기 중인 환자들의 이름이 보였다. 이름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진료실은 모두 4개였고, 유독 1번 진료실의 줄이 길었다. 그 끄트머리에 내 이름 석 자가 보였다.
어린 시절 병원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좋지 않지만, 그중에서도 진료실 앞 복도에서 내 이름을 크게 부르던 간호사의 목소리는 공포에 가까웠다. '드디어 내 차례구나!' 내 이름이 언제 불려질지 몰라 더욱 긴장했던 그 시절에 비하면, 모니터는 친절했다. 적어도 마음의 준비를 차근차근할 틈을 주었다.
사실, 병원 정문에 들어서기 전부터 마음의 준비는 끝났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내 몸의 상태와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일주일 전 금요일 오후, 나는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응급실에 실려왔었다. 진통제를 병째 맞으며 이런저런 검사를 하고서, 내 몸에 심상치 않은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통증이 가라앉아 월요일 오후에 퇴원을 했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주일 후 외래진료를 온 터였다.
1번 진료실은 K대학병원 산부인과 과장이 맡고 있었다.
아직 그의 얼굴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진료실에 들어가는 뒷모습을 봤었다. 한눈에 봐도 나이가 많아 보였다. 보통 사람들에 비해 확연히 느린 걸음걸이, 약간이지만 앞으로 구부러진 그의 허리가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짐작만 했던 그의 나이는, 진료대기실 입구에 걸린 홍보지를 보고서 확신할 수 있었다. 학력, 경력, 수술 횟수, 시술 성공사례 등 눈부신 업적이 빼곡히 적힌 글씨들 옆에서 그가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경험이 많으신 분이구나.'
홍보지를 보니, 내 몸을 맡겨도 괜찮겠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라고 만든 홍보지였으니까.
얼마를 기다렸을까, 더 이상 뒤적일 인터넷 뉴스가 없어질 무렵 내 이름이 불렸다.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검은색 동그란 회전의자에 걸터앉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자궁근종이네. 난소에 붙어 있는 거라 떼야지. 수술 날짜 빨리 잡아요."
홍보지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외모의 남자가 말했다. 인상이 너무 달라서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자신을 찾아온 환자에게 첫인사로 "안녕하세요." 대신 "자궁근종이네."라는 말을 건네는 사람, 나는 그가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남자는 계속해서 내 얼굴이 아닌 모니터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위치가 안 좋아서 개복수술을 할 거고, 수술하고 일주일이면 퇴원해요. 혹시 궁금한 거는?"
남자가 처음으로 시선을 돌려 나를 봤다. 동태의 것과 같은, 감정 없는 눈 두 개가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
'빨리 물어보고 나가. 자, 다음 환자!'
그의 찰나와도 같은 설명을 듣고 나니, 하나부터 열까지 궁금해져서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래서 가장 걱정스러운 부분부터 꺼냈다.
"혹시, 수술 후에 난소 기능에는 문제가 없을까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가 대답했다.
"그게 기술이죠!"
예? 예? 기술이라니요?!
드라마에서 보았던, '그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와 같은 대사를 바랐던 건 아니다.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의 위험이 있고, 그럼에도 수술을 해야 하는 이유 정도를 설명해준다면 대답이 될 것 같았다. 그것도 아니면, '걱정되시죠?' 하고 내 기분을 인정해주는 말 한마디면 충분할 것 같았다.
하지만 걱정하는 환자 앞에서 자신의 의술을 자랑하는 그는, 의사가 아닌, 기술자였다.
그렇다고 며칠 뒤면 내 몸에 칼을 댈 의사에게 불쾌한 내색을 할 수도 없었다. 뭐라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잠자코 있는 사이, 기술자가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렇게 하는 게 기술이죠."
그의 자신감 앞에서 나는 안도해야 했을까? 아니다. 마음이 씁쓸했다. 기술자의 성과에 숫자 하나를 더 올려줄, 점 하나만도 못한 환자가 된 기분이었다. 한 시간 반을 기다려, 5분이 넘지 않는 대면을 마치고 진료실을 나오면서... 진료실에 들어가던 기술자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허리를 숙인 채 걷던 이유를, 나는 그의 나이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무릎과 허리가 시원찮아 걸음걸이가 구부정한 줄 알았다. 아마도 내 착각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오랫동안 자신의 분야에서 쌓아온 업적과 자만심을 등에 짊어지고 다니기 때문은 아닐까?
나는 그날 그곳에서 기술자를 만나버렸다. 그리고 그 후로 그를 조금 더 알게 되면서, 그에 대한 적개심이 확고해졌다. 그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종종 등장할 텐데, 글을 쓰기 위해 다시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분이 언짢아질 것 같다.
✿ 분명히 밝혀두는 사실은, 지금의 K대학병원 산부인과 과장은 다른 분이 부임해 계신다. 혹, 오해 마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