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워 괴물아!

영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드라마 《스위트홈》

by 사건의 지평선


괴물, 마음 속 감춰두었던 것들이 봉인 해제되는 시간


우리가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괴물로 길들여져 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아니, 마음 속 깊숙이 감춰둔 괴물의 모습 하나하나를 꺼내놓기 시작하는 게 인생 이야기인지도. 인간인 우리가 괴물로 변화한다는 이야기든, 괴물인 우리가 인간의 탈을 벗게 되었다는 이야기든 결국 인간의 가슴 속에 괴물 하나쯤은 자리하고 있다는 건 살다 보면 금세 알게 되는 진실일 것이다. 마주치고 싶지 않은, 회피하고 싶은 것뿐이지 말이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인간의 부정적인 지점을 언급하는 건 상당히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그건 마치 우리의 ‘역린’을 건드리는 것과 같은, 금기의 영역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외세의 침략 속에서도 단 한 번도 다른 민족을 먼저 공격한 적이 없는 선량한 백의민족이었고, 유교적 가치관에 따라 타인을 공정하게 대우하는 합리적인 사람들이어야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늘 좋은 사람이어야 하고’,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유난히 도드라지는 우리 시대의 저변에는 끔찍한 역사의 터널을 걸어야 했던, 당대의 현실 타격을 완화하기 위한 방어기제가 자리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잘 살아 보기 위해’ 달려야 했고, 사소한 이야기들 때문에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긍정적인 것들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시크릿’의 주문 만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었다. 한국은 정말 열심히 달렸다. 그래서 잘 살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젠 열심히 달려도 잘 살 수 없게 된 잔재물이 돼버린 청춘들이 이 땅에 가득하게 돼버렸다. 우린 더 이상 ‘시크릿’의 주문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제서야 아주 뒤늦게 천천히 우리 안의 괴물들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이젠 긍정보다 혐오가 만연해진 세상을 살게 됐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막말’과 ‘깎아내리기’가 보편적인 흐름이 된지 10여년이 흘렀고, 최근 정치권에서도 ‘셀프저격’으로 지지율을 호소하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혐오의 시대 속 우리 안의 괴물을 이야기한 작품들을 살펴보는 건 의미 있는 분석이 되리라 생각한다.



영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여전히 착한 사람,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하여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2013, 장준환 감독)는 3살 때 범죄조직 낮도깨비에게 납치된 화이가 그들에게 길러지고, 성장한 데서 이야기가 출발한다. 친부모와 헤어지게 만든 다섯 명의 원수이자 악한들을 화이가 ‘아빠’로 알고 자라는 데서 화이의 ‘괴물성’은 출발한다. 화이의 친부모는 성지재단 고아원을 운영하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화이는 친부모의 존재와 자신이 어떻게 범죄자들에게 길러지게 됐는지 그 내막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는 미성년자 임에도 능숙하게 큰 차를 운전할 줄 알고 사격 솜씨도 기가 막히다. 지략도 뛰어난데 이는 모두 5명 아빠들 각각의 능력을 전수 받았기 때문이다.


아빠들이 묘목 밑에 시체들을 묻는 걸 보고 자랐지만 화이는 그에 크게 영향을 받진 않았다. 화이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학교를 다니지는 않지만 외출할 땐 늘 교복을 입고 나가는, 그 또래 아이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고 싶은 순수한 소년이다. 화이는 아빠들에 의해 범죄에 가담하게 되는데, 처음으로 총으로 사람을 쏴 죽인다. 그런데 화이가 죽인 임형택이 그의 친아버지고, 자신이 아빠들이라고 믿었던 이들에게 납치돼 컸다는 진실을 알게 되며 그때부터 ‘괴물성’이 폭발하기 시작한다. 화이는 다섯 명의 아빠들을 잔인하게 죽인다. 아이러니한 지점은 범죄행각에선 누구보다 잔인했던 5명이 화이 앞에서는 영락없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를 대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화이는 소중한 아들이었다.


화이가 살아가는 시대적 배경은 진짜 괴물이 나타나는, 아포칼립스가 도래하는 세상은 아니었다. 영화에는 괴물이 등장하지만 그것은 화이가 환각 속에서 마주하는 괴물일 뿐 진짜 괴물이 아니다. 석태는 괴물을 볼 줄 아는 화이에게서 자신을 본다. 자신 역시 고아원에서 자란 어린 시절 괴물을 보는 것 때문에 고통스러운 시간을 살았기 때문이다. 석태가 이를 해결한 방식은 스스로가 괴물이 되니 괴물이 알아서 사라졌단 것이다. 따라서 그는 화이에게 괴물이 되길 끊임없이 권한다. 그래서 화이가 자신의 친아버지를 죽이도록 종용했던 거다.


화이는 자신을 길러준 다섯 명의 아빠들을 직접 죽인 살인자가 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괴물이 되지 않았다. 영화 제목이 ‘괴물을 삼킨 아이’지 ‘괴물이 된 아이’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작품에 나타난 ‘괴물성’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외려 ‘인간성’에 대한 이야기에 가깝다. 괴물이란 것도 화이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고, 화이는 자신이 여태껏 살아온 삶에 대해 분열하고 분노할 뿐, 자기 안에 내재돼 있는 ‘괴물성’에 직접적으로 다다르진 못한다. 다다르지 못했다는 것은 자기 안의 괴물성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이는 살인을 저지를 만큼 망가졌지만, 화이는 자기혐오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선과 악을 분류하여 악한들에 한해 악을 터뜨릴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또한 그는 적극적으로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기도 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가 좋아하는 여자 친구인 유경에게 직접 그린 초상화와 카메라를 주는 장면은 화이가 여전히 ‘사랑’의 마음을 간직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 여겨지는, 낮도깨비에게 살인을 교사하는 전 회장을 총으로 쏜다.


여기서 자기혐오, 괴물성을 다루는 2013년도 방식이 주목된다. 이는 ‘괴물성’인간에게서 배제하려는 모습이 남아있고, 외려 ‘인간성’을 강조함으로써 괴물성이 상대적으로 타자화되는 것으로 다루어짐을 유추할 수 있다. 화이는 자신이 망가졌지만, 여전히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의 원래 출생성분은 고귀한 부잣집이며 인품이 좋기로 소문이 자자한 임형택의 아들이다. 그는 아빠들에게 여자를 꼬시려면 먼저 자빠뜨리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음에도 그 말에 전혀 영향 받지 않는다. 짝사랑하는 유경의 모습을 남몰래 훔쳐보고, 자신이 아빠들의 범죄에 가담하는 정도가 점점 깊어지자 유경에게 다가가는 걸 멈추는 순수를 가졌다.

이러한 타고난 선함의 바탕이 여전히 화이 안에 계속되고 있다는 걸 영화는 마지막까지 놓치지 않는다. 그리하여 마지막에 악한 전 회장을 죽임으로써, 화이의 살인에 정당함을 부여한다. 화이는 괴물이 아니다. 화이는 괴물을 삼켰고 자신 안의 괴물을 선함을 위해 사용한다. 고로 화이는 다섯 명의 아빠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걸 밝혀낸다. 영화는 개봉했을 당시 관객들에게 충격을 선사했다. 10대의 청소년이 자신을 키워준 아빠들을 살인하고, 5명의 아빠들 역시 잔혹하게 범죄와 살인을 웃으며 저지르는 장면을 과감 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경찰이 범죄조직 낮도깨비와 가담해 기업가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하며 살인을 주문하는 등, 영화에서 그려진 세상의 모습은 괴물보다 더 적나라하고 끔찍하다. 영화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에게 자리한 부성애를 보여줌과 동시에 순수한 소년의 괴물성도 함께 드러내는 파격을 선사한다. 하지만 그 괴물성이 결과적으로는 더 큰 악을 무찌르기 위한 도구로 봉합된다. 그로써 우리 안에 존재하는 괴물성이 온전히 다루어지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한다.


드라마 《스위트홈》, “나는 괴물이다. 고로 살고 싶다!”


드라마 《스위트홈》(2020,넷플릭스)은 괴물로 인해 세계의 질서가 마비되고, 인간이 괴생명체로 변화하는 아포칼립스를 담는다. 아포칼립스가 시작되며 사람들은 감추어두었던 이기심을 마음껏 드러내기 시작한다. 사람을 물건처럼 ‘활용’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 돼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괴물이 등장하기 전의 세상에서 암암리에 그러했던 것들이 이제는 대놓고 그렇게 하는 게 마땅한 것으로 ‘형식’만 바뀐 것인지도. 인간의 괴물화가 진행되는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숨기고 싶던 이야기들을 마음껏 펼쳐내기 시작한다. 바로 숨겨두었던 ‘자기혐오’다.


2020년의 대중들은 ‘자기혐오’에 거부감을 가지지 않는다. 시청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괴물성을 드러내는 인물들을 보게 된다. ‘한 과장 씨발놈아’를 외치며 괴물화가 진행되는 평범한 회사원, 한편 대통령은 텔레비전 생방송으로 담화문을 발표하던 중 “국민의 안전은 씨발, 다 죽을 거야. 좆됐어.”라며 괴생명체가 될 신호를 보인다. 도덕, 예의, 법이라는 가림막으로 지켜왔던 인간의 하이드적인 면모가 거침없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괴물의 종류 또한 다양하다. 아무리 죽이려 해도 불멸하는 괴물이 있는가 하면, 한 두 명이 의기투합하면 금세 죽는괴물도 있다. 공격하는 괴물도 있지만 외려 인간을 보호하는 괴물도 존재하며, 액체 괴물, 고체괴물, 동물, 곤충 등 괴물은 넓은 스펙트럼을 형성한다.

아포칼립스가 시작하기 직전, 19살 현수의 내면은 소리 없는 아우성들로 가득 차있었다. 평범한 고등학생 이었던 그의 인생은 학교폭력으로 순식간에 뒤바뀐다. 학교 폭력 가해자는 현수 아버지가 근무하는 회사 오너의 아들이었고, 가족들은 현수에게 그 아이를 용서하라고만 한다. ‘권선징악’은 없었다. 선을 행하니 악이 돌아오는 세상은 혼란스러울 뿐이다. 이미 충분히 고독한 현수에게 다시 한 번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진다. 현수를 제외한 가족 구성원 모두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만다. 이제 정말 혼자였고 그가 살아야 할 이유 따윈 없다. 8월 25일, ‘자살’을 계획한다. 현수의 팔은 수없는 자해의 흔적들로 가득했다. 전 재산 3천만 원, 미성년자 소년은 재개발을 앞둔 허름한 그린홈에 홀로 이사 온다. 그런데, 세상이 멸망했으면 좋겠다는 현수의 소원이 이뤄졌다. 사람들이 괴물로 변하기 시작했다.


잦은 코피와 환청, 원래 이곳에 있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증상을 보였기 때문에 이리로 온 것이었다. 그들은 처참하고 절망적인 모습으로 변했다. 모든 예상은 빗나갔고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고 결코 멈추지 않는다. 나도 그것에 잡아먹혀 버렸다. 인간은 결코 이것을 이겨낼 수 없다. 증상이 있다면 늦기 전에 자살해라.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민폐니까.

_《스위트홈》 2화 중


현수는 이제 더할 나위 없는 자살의 명분을 찾았다. 코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쓰러지고 환청과 환각을 겪는다. 그런데, 현수는 괴물이 되려는 그때부터 그는 ‘살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기 시작한다. 현수를 구원한 건 다름 아닌 ‘괴물화가 된 세상’을 만나고 나서부터다. 작품의 아포칼립스는 마치 현수의 내면세계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괴물들은 하나 같이 일관성이 없고, 사람들은 선과 악의 경계를 쉽게 넘나든다.

질풍노도의 뜨거운 심장 속 터질 듯한 악마들이 나열된 시간은 누구나 살면서 적어도 한 번 쯤은 겪게 될 이야기이기도 하다. 1410호에 혼자 고립되었던 현수는 괴물이 등장하며 더 이상 집안에 갇혀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문을 열고 나온다. 깜깜한 어둠 속 괴물을 보았을 때 그는 본능적으로 도망치는 자신을 보며 깨닫는다. 자신은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살고 싶은 거였다고.


드라마는 현수가 ‘자기혐오’와 ‘괴물화’가 진행되는 걸 자연스럽게 담아낸다. 자신 안의 괴물이 온전히 드러나는 순간 오히려 현수 안에 생명력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현수는 괴물화가 진행되고 나서야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괴물이 된 현수는 다시 누군가를 도와주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건 부모를 잃은 어린 남매를 보았을 때다. 두식은 현수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그의 마음을 말해준다. “아이들을 구하고 싶나?”라고 말이다. 현수는 다시 한 번 선을 향해 성큼 움직이기 시작한다. 괴물에게 아버지를 잃고 떨고 있는 아이들을 두식에게 데려다주고 1층으로 내려가 괴물을 막는데 힘 써보겠다고 내려간 현수, 그렇지만 그가 다시 마주하게 된 세상은 ‘소외와 따돌림’이었다. 괴물화가 진행되는 현수가 사람들에게 어떤 위협을 가할지 모르겠단 이유에서다. 거수투표 결과로 현수는 그린홈에서는 살 수 있었지만 감금된 상태로 지내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갖고 오는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사람으로서가 아닌 유용한 물건 같은 존재인 것이다. 시시때때로 검은 빛으로 변하는 현수의 눈은 사람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된다. 현수는 상처 받는순간마다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침잠한다. 괴물화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또 다른 나’를 만나는 환각을 보며 어두운 목소리를 내는 자신을 마주해야 한다.


현수 안의 ‘또 다른 나’ 괴물은 달콤하고 설득력 있게 현수에게 외친다. 넌 억울하고 불쌍하며, 네가 증오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을 다 사라져 버리게 할 수 있으니 그냥 ‘나’를 받아들이면 된다고, 어서 괴물이 되라고 손짓한다. 이때, 현수와 사람들과의 교감은 중요하게 작용한다. 괴물이 되어서도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 두식의 화장실에 꽁꽁 숨은 채 죽은 자신의 아기를 품고 사는 명숙을 본다. 두식과 길섭, 은유 역시 현수가 괴물화가 진행되는 상황에도 그를 꺼려하거나 혐오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대해주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그의 괴물화를 저지하는 힘이다. 그럼에도 결국 현수는 괴물이 된다. 자신의 팔에 자라난 검은 날개를 활짝 펼침으로써 그의 괴물성은 그린홈 사람들 앞에서 온전히 드러난다. 그런데, 그에게 드리워진 깊은 그림자만큼

동시에 빛이 자라고 있었다.


괴물성만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이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다. 군인들이 그린홈에 생존한 이들과 현수를 포위하는 상황에 사람들이 도망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다. 그 홀로 군인에게 자발적으로 나아가며 잡혀간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떠올리게 한다. ‘세상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에 대한 의문을 넘어서 ‘세상이 그럼에도 불구해도 괜찮다’는 모순율을 끌어안는 성장이 그 안에 일어나고 있었다. 현수는 사람으로 가득했던 세상에서는 사과 받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포칼립스가 펼쳐진 때에야, 몸이 괴물로 변해가고 있을 때에야 오랫동안 듣고 싶었던 말을 듣는다. 괴물화가 진행되던 선영은 현수와 함께 감금되는 상황이 일어나자 현수의 마음을 이해하며 "아휴 어떻게 버텼을까 이제 알았는데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못난 어른이라서 미안해" 말한 거다. 두식 역시 현수 스스로도 혐오하는 괴물이 되었을 때 그 자리에서 곧바로 그를 끌어안아주며 “괜찮다.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준다.


이해받고 소통하며 현수는 그만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지켜주는 ‘사랑하는 괴물’로 증식한다. 현수의 괴물화는 우리가 그동안 믿고 있던 ‘착함’에 대한 강력한 믿음이 깨어지는 걸 보여준다. 하지만 선(善)이라는 가치가 결국에는 수많은 인간이란 괴물이 연대의 손을 잡고 어떻게든 지키고 싶어하는 이상이자 지독한 꿈이라는 것 역시 함께 보여준다.


화이가 현수를 만난다면, 현수가 화이를 만난다면


상상을 해보았다. 2013년의 화이가 2020년의 현수를 만난다면, 2020년의 현수가 2013년의 화이를 만난다면 서로에게 어떤 말을 건넬까? 어떤 관계가 이들에게 펼쳐질지 궁금했다. 2013년의 화이가 2020년의 아포칼립스 세상에 와서 괴물이 된 화이를 보면, 우선은 그의 날개를 자르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 날개가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 거라고 생각해서 말이다. 그때 현수는 살그머니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화이의 손을 잡아주며 말할 것 같다. “괜찮아. 고마워.” 어떻게든 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애쓰는 화이의 마음이 두식 아저씨와 같다는 걸 현수는 한 눈에 알아차릴 것이다. 화이는 7년 동안 업그레이드를 거듭한 신종 게임에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명석한 두뇌를 이용해 주식과 코인으로 현수의 3천만원 재산을 30억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이 그토록 아등바등하며 무찌르려고 했던 악한 자본가가 된다는 게 이토록 허망하고 아무것도 아닌 거였다는 걸 깨달으며 어엿한 스물네 살의 청년으로 살아갈 지도. 그러다 어느 날 아빠들의 무덤을 찾아가 하소연을 할지도모른다. “그깟 돈이 뭐라고 뭐 그렇게 흉하게 사신 거예요. 난 여전히 내 친 아빠를 포함해 아빠들까지 내 손으로 죽였다는 게 괴로워서, 그 모습을 한 나 자신이 끔찍하게 싫어서 나의 진짜를 통제하고 어떻게든 외면하며 살아요.”라고 말이다.


반대로 2020년의 현수가 2013년의 화이를 찾아온다면? 화이는 “너는 아빠들이랑 다르다고 너는 깨끗하다고 너 아빠가 더럽지? 창피하지?”, “아빠들이 다 괴물들인데 너도 괴물이 돼야지 안 그래? 그래야 같이 살지.”라며 괴물화를 종용 당한다. 어떻게든 선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화이는 자기 안의 괴물성이 괴롭다. 그리고 이를 분리하기 위해 애쓸 것이다. 그리고 현수를 향해, “나로 살아간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야, 그치?”라며 눈물이 흐르는 채 미소를 보낼지도 모른다. “나도 너처럼 누군가를 죽이지 않는 괴물이라면 참 좋을 텐데.”라고 말하는 화이에게 현수는“나는 이미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 가족이 죽었을 때, 나한테 떨어지는 돈이 이것밖에 안되냐며 원망부터 했어. 그건 죽인 거나 마찬가지야.” 말을 건넬 것이다.


화이와 현수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최선의 착함을 발휘하였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안에 내재하고 있는 괴물성을 맞닥뜨려야만 하는 지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화이에게 당연한 세상은 괴물성은 통제되어야 하며, 괴물성이 드러나더라도 세상의 이로움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에서 조금 더 각박하고 치열하다. 반면에 현수의 괴물성은 그의 책임이 아니다. 괴물화가 보편적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현수의 괴물화는 오래 전 어른들이 잘못 쌓은 탑들의 결과라는 걸 그들 스스로 인정하고, 현수에게 사과하기 시작한다. 이 둘의 캐릭터는 2013년에서 2020년대를 넘어오며 우리 사회의 변화를 단면에 보여주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개인의 역량이 아주 중요했던 화이의 시대에서 사회의 책임이 더 강조되는 현수의 세상으로 넘어온 걸 보여주는 걸 수 있다. 조금 더 비관적으로 본다면, 괴물성에서 어떻게든 사람의 선함을 찾고자 했던 낭만의 시대에서 모두가 괴물로 변해버린 지극히 현실주의적 세태로 변해버린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한편 또 다른 관점에서 적용한다면, 괴물성을 어떻게든 통제하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화이로, 괴물과 함께하며 살아간다는 ‘위드 코로나’를 현수로 볼 수도 있다. 화이이건 현수이건 관계없이, 우리가 스스로의 괴물성을 마주할 수 있게 됐다는 건 중요한 변곡점으로 작용할 것으로 생각된다. 시대적 흐름과 관계없이 우린 화이의 방식으로 혹은 현수의 방식으로 오늘도 나의 괴물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가슴을 쓸어안는 조금 더 진짜의 나와 가까울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게 됐다는 의의를 본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반가워 괴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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