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앙보다 값진 환대,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겨울의 외로움을 감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귀뚜라미가 울 땐 24도래.
안단다 자기들도. 조금 있으면 겨울이 온다는 걸.
그래서 간절히 구애중인거야. 겨울을 혼자 나지 않으려고.
_1화 기정 대사
해방일지를 보며 저들은 왜 늘 추울까 생각하였습니다. 초록으로 충만한 그때도 귀뚜라미의 울음을 듣고 외로운 겨울을 감지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조금 쌀쌀해진 계절, 11월에 들어서니 지나간 드라마 생각이 간절하네요. 아니 쌀쌀해서라기보다 아름답지 못한 퇴사 한바퀴를 돌리고 나니 당신들 생각이 나요. 작가님의 전작 <나의 아저씨>에서 지안은 평안함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삼남매 그대들은 여전히 받는 사람으로, 늘 그랬듯 무심하고 귀한 하루를 보내고들 계시는지 그냥 궁금하여서요.
삼포, 견딜 수 없는 촌스러움
애인이랑 이별을 하는 중에도 누나와 동생이 먼저 택시타고 들어갈까봐 전전긍긍하는 창희(이민기 분), 여자친구 예린은 그에게 "넌 견딜 수 없을만큼 촌스럽다"는 팩폭을 날리죠. 이들이 사는 곳 '삼포'라는 곳은 그런 곳입니다. 에어컨보다는 선풍기가 당연하고, 주말엔 온가족이 함께 모여 농사를 짓는 일상이 서른이 족히 넘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지긋지긋한 곳.
드라마는 이것을 '힐링'이라느니, '가족애'라느니 하는 말들로 포장하지 않아요. 어쩜 한식구가 밥을 먹는 장면들이 그리도 지겨워 보이는지. 우리의 일상같은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보고 있는 듯 하기도 합니다.
오늘 당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겁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고 긴긴 시간 이렇게 보내다간 말라 죽을 거 같아서
_1화 미정 내레이션
지긋지긋한 일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드라마의 초입부. 출퇴근길, 연인과의 이별, 한 마디의 말로 사람을 갉아먹는 직장 동료. 큰 갈등은 일어나지 않지만, 잔잔하지만 분명한 파동들이 이들의 자존감을 무너뜨립니다. 그러나 자동반사적으로 그들은 날마다 회사로 가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일상을 지속해 나갑니다.
삼남매는 조금씩 지겨운 자신들의 삶에 탈출구를 찾아갑니다. 막내 미정(김지원 분)이 가장 먼저 대포를 쏘아 올립니다. 바로, 출신도 이름도 모르는 구씨(손석구 분)에게 자기를 추앙하라는 고백 아닌 선언을 해버리는 거죠. 아무나 사랑하겠다고 선언한 첫째 기정(이엘 분)도, 구씨의 비싼 외제차를 타며 몹시도 다정한 자신을 발견한 둘째 창희도 자기 자신을 넘어서 다른 사람에게 기대보기로 작정하였을 때 조금씩 빛나기 시작합니다. 마치 타들어갔던 장작에 불이 붙기 시작하는 것처럼요.
선 넘고 무례한 인간들의 향연 속에서, 지긋지긋한 인간들에게서 해방을 선언한 그들이 가는 곳은 결국 환대입니다. 편의점 사업으로 조금씩 어깨를 피기 시작한 창희가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지키고 싶었던 건 현아(전혜진 분)의 전 남친 혁수의 임종인 것처럼 말이죠. 지극히 이기적이고 본인 위주의 삶을 추구하는 줄 알았던 창희였기에 이는 드라마의 반전 중 하나라고 느꼈어요.
나를 괴롭히는 인간 하나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는 게 버겁고 꿈 속에서도 망상에서도 날 선 그 모습이 드러나는데, 그를 향해 "그래도 환대할게"라고 구씨는 나지막이 말합니다.
인간으로부터의 해방, 그럼에도 누군가를 열렬히 응원하고 배신을 당하는 상황이 와도 결국 환대한다고 하는, 아름다운 정-반-합의 구조. 기승전결이 아닌 결국 우리의 인생은 진동처럼 흘러가고 있으며 그 파장이 결국 사랑을 만들어가고 있음을 어느날 문득 담담히 내려다보게 됨을 알 수 있게 해준 드라마였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결국 존재할 수 없는 큰 사랑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당신의 위로가 너무도 절실하게 그리워지는 2022년 11월 입니다. 모두모두 건강히 안녕히 잘 지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