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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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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지잼 Jul 24. 2023

국지성 집중호우

2023-07-22

모든 일정을 마치고 나니 생각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나는 시간이 없고 야심한 시각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을 미친 짓을 했다.


내비게이션을 찍어보니, 거리가 멀지 않았다. 

내 기준에서는 집으로 가는 방향이었고, 그냥 잠깐만, 아주 잠깐만 샛길로 빠지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목적지를 변경하고 말았다.


울렁울렁

이상한 예감에 심장이 요동쳤다. 어차피 만나지 못할 걸 알고 있는데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내 마음을 춤추게 만들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거의 99.9%의 확률로 실패할 모험이라는 걸. 그런데 자꾸만 마음은 반대로 춤췄다. 혹시나, 만에 하나, 만나버리면 어떻게 하나. 말도 안 되게. 그래, 흔해빠진 드라마 한 장면처럼!


아, 음. 지나던 길에. 어, 이런 참 우연이 다 있네요! 하하. 하하하.


어색하게 웃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어색해하는 나를 보며 다 안다는 듯, 부드럽게 눈웃음 짓는 그 사람의 얼굴도 상상했다. 언제나처럼 나를 무안하게 하지 않고 다정하게 맞이해 주겠지.


어서오세요, 식사는 하셨어요? 


그 사람은 웃으며 말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얼큰하게 취한 그의 얼굴을 보게 될지도 몰랐다.

조금은 발그레한 그 두 뺨에, 평소보다 동그랗게 커진 두 눈을 하고, 평소보다 조금 더 격앙된 목소리로 내 이름을 외치는 그 사람의 목소리를 상상했다. 나는 술 한 방울 마시지 않았지만 그 사람처럼 뺨을 붉히고, 눈을 커다랗게 뜨겠지. 그리고 똑같이 격앙된 목소리로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아니아니, 어쩌면. 질린 듯한 얼굴로 떨떠름하게 나를 바라볼지도 모른다.


어... 여기는 어떻게...


그 사람 주변에는 내가 모르는 낯선 얼굴들이 있고, 그중에는 그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낯선 8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나를 쳐다보며 물음표를 쏟아낼 것이다. 내가 그 눈빛을 받아낼 수 있을까? 그러고도 서 있을 수 있을까? 아, 용기가 사라졌다. 지금이라도 목적지를 변경하자.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를 변경하려고 보니, 조금만 더 가면 그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그 장소에 도달할 것 같았다. 아, 여기까지 왔는데 어쩌지. 우연에 기대고 싶은 마음과 혹시나 모를 불편한 상황을 피하고 싶은 본능이 부딪혔다. 하지만 결국 사랑이 두려움을 이겼다. 나는 기왕 온 거,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거기 가서 그 사람을 찾으러 일부러 돌아다닐 것도 아니고. 그냥 차 안에서 내리지도 않고, 휘 둘러보고 바로 내려올 것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 사람을 발견하면 몰래 쓱 지나가면서 쳐다보고... 그냥 딱 그 정도만 할 거니까. 이 정도는 괜찮잖아. 


밤이 점점 짙어지고, 비는 그칠 줄 몰랐다. 내리는 비마다 짙은 녹색이 묻어났다. 목적지가 가까울수록, 기대감과 불안이 뒤섞여 점점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삐그덕 거리면서 움직이다가 이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도착지는 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와 같은 수준의 난해한 문제였다. 그래도 내 두 눈은 부지런히 좌우를 살폈다. 하지만 그 사람처럼 보이는 그림자는 단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유턴을 하고 나서야 겨우 깊은 현타와 함께, 실소가 나왔다. 내가 뭐 하는 짓이람.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고, 들켜서는 절대 안 될(잘못하면 스토커로 신고당할 수 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버렸다는 자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은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그렇지만 내 차 어딘가에는 그 숲 속에서 묻혀온 짙은 녹음의 물방울이 자꾸만 풀 냄새를 풍겼다. 창문을 열었더니, 내 온몸 가득 진득한 그리움이 달라붙었다. 샤워를 해도 떨쳐지지 않는 눅진한 그리움을 끌어안고, 내 방 어둠 속을 가만히 응시했다. 내 작은 방이 금세 풀 냄새로 가득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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