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강원도할머니와 손녀
'다 키우고 쓰는 육아일기'에 나의 엄마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나를 위한 엄마의 헌신도 헌신이지만 내가 창업을 하고 나서 3년간 엄마가 내 딸을 돌봐주셨다. 당시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신 후 시골집에서 혼자 지내고 계셨지만 친밀한 이웃을 떠나, 낯선 도시에서 아파트 생활을 하며 손주를 돌보는 일이 혼자 지내는 시골생활의 적적함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 엄마는 불과 서너 살 무렵 엄마를 잃었다. 그 옛날, 무슨 병인지도 모른 채 약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젊디 젊은 엄마의 엄마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은 외할머니를 나는 동네 할머니들 입을 통해서만 머릿속에 그려보곤 했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 하니 인물이 좋았지. 니들 인물이 외할머니만은 못하지."
아이를 낳고 나니 너무나 빨리 엄마를 잃은 나의 엄마가 안쓰럽고, 어린 딸을 두고 떠나야 했던 외할머니의 심정이 어땠을지 가슴에 사무쳤다. 이런 생각도 일종의 트라우마로 작용했을까? 딸이 성인이 되기도 전에, 내가 불의의 사고나 병으로 세상을 떠날까 봐, 나는 그게 가장 무서웠다.
"이 아이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결코 아프거나 죽을 수 없습니다."
하늘을 보며 종종 이렇게 속엣말을 했다.
(아이가 성인이 된 지금은? 결혼도 시켜야 하고, 손주도 봐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부디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인생장수는 역시 만인의 꿈인가 보다. 하하.)
그 시절 시골 어르신 답지 않게 다정다감한 내 외할아버지 성격을 닮았던 것일까? '엄마사랑'을 느껴보지도 못하고 성장한 엄마였지만, 엄마는 자식들에게 한없이 관대하고 다정했다.
바쁜 농사일에, 대가족의 식사까지 챙겨야 했던 엄마의 일과가 얼마나 정신없었을지 뻔히 짐작이 간다. 그럼에도 학교 가라고 우리를 깨울 때, 얼른 못 일어나면 짜증이 났을 법도 한데, 엄마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곯아떨어진 우리를 정 깨우기 힘든 날이면 큰 소리를 내는 대신 입에 알사탕을 넣어주시곤 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쯤 됐을까? 아직도 생생한 기억이 하나 있다.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열었는데 밥 통에도, 반찬 통에도 모두 밥만 담겨 있었다. 나중에 집에 와서 들어보니 오빠 도시락에는 둘 다 반찬만 들어 있었다고 했다. 같은 학교를 다녔음에도 왜 오빠 교실에 가 볼 생각을 못했는지 모르겠다. 철없는 그때는 그냥 그 사실이 창피해서 얼른 도시락 뚜껑을 닫고 점심을 굶었던 기억이 있다.
그 아침, 엄마는 얼마나 바빴던 걸까?
그럼에도 자식은 부모의 헌신을 알지 못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혹은 너무 늦게 안다.
시험기간이면 공부하는 내 옆에서 급할 것도 없는 바느질을 하며, 졸다 깨다 늦은 밤까지 함께 해줬던 엄마.
푸세식 화장실에 혼자 가기가 무서워 밤늦게 곤히 잠든 엄마를 깨우면 얼른 일어나 화장실 문 앞을 지키던 엄마.
추운 겨울날이면 부뚜막에 신발을 올려 뒀다가 신겨주며 학교 가는 딸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엄마.
집을 떠나 자취생활을 했던 고등학교 때는 딸의 생일날 시루떡을 만들어 학교까지 들고 왔던 엄마. 없는 살림에도 딸의 기를 살려주고 싶었던 건지 엄마는 선생님과 반친구들까지 나눠먹을 만큼 많은 떡을 해왔다.
그리고 딸의 긴 산통을 지켜보며 눈물을 참지 못했던 엄마.
그런 엄마가 또다시 손주를 키워주기 위해 3년이나 딸 내 집에서 사셨으니..... 이제와 생각하면 더욱 염치가 없다. 톡 튀어나온 이마 때문에 짱구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우리 딸은 맞벌이 부모의 외동이었지만, 외할머니 덕에 건강하고 발랄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짱구와 강원도 외할머니의 '케미'는 더없이 좋았다.
직접 빚은 만두와 농사지은 옥수수, 콩 그리고 각종 산나물... 엄마의 택배는 딸의 나이 오십이 되어도 멈출 줄 모른다.
친정에서 기껏 하루 이틀 지내다 집으로 돌아가는 아침. 엄마는 가는 길에 먹으라며 김밥을 싸신다. 3시간 남짓 걸리는 그 길에 자식이 행여 배고프진 않을까 걱정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