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야옹 Mar 05. 2024

카레에 대하여

재택근무를 할 때에는 카레를 자주 만든다.


사람들은 보통 카레를 만들 때 집에서 배운 레시피들을 사용하는 모양이지만, 내가 만드는 카레는 우리 집에서 전해 내려오는 레시피가 아니고,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정착한 별도의 레시피이다.


고백하건대 내가 어머니의 카레를 좋아하지 않았던 탓이다. 독립하기 전까지 나는 내가 카레를 싫어하는 사람인 줄만 알았다. 지금은 매일 카레를 먹으라고 해도 좋다.


마늘과 양파를 할 수 있는 한 얇게 썰어서 볶는다. 어니언 수프를 만들 때처럼 캐러멜라이즈 된 양파를 만드는 것이 목표이다. 이때 질 좋은 올리브유를 아낌없이 넣되, 너무 많이 넣어서 재료가 튀겨지지 않도록 주의한다.


양파가 흐물흐물해진다고 다가 아니다. 냄비 바닥이 갈색이 될 때까지 볶아준다. 내가 읽었던 일본 요리책에서는 이 과정을 '맛있는 냄비를 만든다'라고 표현했는데, 나중에 프랑스 요리책을 읽고서는 동일한 과정을 캐러멜라이즈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고는 무척 놀랐다. 일본의 주부와 프랑스 요리사 사이에 어떤 텔레파시가 통한 것도 아닐 텐데 어쩜 이리도 멀리 떨어진 나라의 사람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양파를 요리하고 있는 걸까? 사실은 양파 행성의 외계인이 인류에게 어느 날 동시다발적으로 메시지를 보내, 양파를 맛있게 요리하고 싶다면 양파가 갈색이 되어 형체도 남지 않을 때까지 볶으라고 계시를 내렸던 것은 아닐까?


이런 식으로 쓸데없는 생각의 나래를 펼치며 양파를 볶은 뒤에는 깍둑썰기한 감자와 고기를 넣어 볶는다. 고기가 중요한데, 보통 카레용으로 나오는 고기는 지방이 적고 퍽퍽해서, 그릇 바닥에서 우연히 건져낸다 한들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 난파선의 보물을 발견한 기분이 들 수 있는 질 좋은 고기를 넣는 것이 포인트이다.


질 좋은 고기를 카레에 넣는 게 아깝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떤 요리이든 재료와 타협하면 타협한 만큼의 맛이 날 뿐이다. 좋은 재료는 반드시 맛으로 보답해 준다. 나는 좋은 고기뿐 아니라 제철의 단단한 채소, 이를테면 가지나 단호박 등도 그때그때 듬뿍 넣는데, 그러면 단순한 카레로도 식탁이 풍성해진다.


가볍게 소금 간을 하고, 물을 넣어 끓인다. 이제 정성 들여서 냄비 바닥을 실리콘 주걱으로 긁어, 아까 만들어 둔 맛있는 냄비의 요소들이 국물에 녹아들도록 한다. 진짜 요리사들은 이 과정을 디글레이징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한 소끔 끓어오르면 고형 카레를 넣고 약불에서 푹 끓이기 시작한다. 나는 이 단계에서 간장을 한 스푼 넣고, 그날그날의 재료의 컨디션에 따라서 토마토 페이스트나 초콜릿(!)을 약간 넣기도 한다. 간장이나 초콜릿이라고 말하면 기겁을 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재료들이 카레에 깊은 맛을 더해 준다.


카레는 미리 만들어두어서 살짝 묵히면 왠지 더욱 맛있고 오래 끓이면 더더욱 맛있다. 이렇게 카레를 잔뜩 만들어 두면 다음날까지 먹을 수 있지만, 때로는 식욕이 돋아 4인분의 카레를 두 식구가 우적우적 먹어치워 버리고는 과식을 했다고 후회하기도 한다.


바닥을 드러낸 카레 냄비에는 언제나 양파를 볶은 흔적이 눌어붙어 있다. 디글레이징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카레 만든 티가 나는 냄비가 되어 버린다.


매번 냄비 바닥을 태우니 설거지 담당은 싫을 법도 하지만, 그렇게 냄비 바닥을 태워 가며 만든 카레를 가장 맛있게 먹는 사람이 바로 설거지 담당 본인이기에 그는 군말 없이 냄비를 씻을 따름이다. 그렇게 깨끗하게 씻어 둔 카레 냄비는 며칠 지나지도 않아 또다시 카레 만들기에 투입되고, 설거지 담당은 또다시 군말 없이 냄비를 씻는다.


화려할 것도 없는 카레를 맛있어하며 비우고, 눌어붙은 양파 자국을 문질러 닦기를 반복하는 생활이 행복하다.


나는 세상이 멸망하는 날, 혹은 내가 죽는 날을 알게 된다면 그 전날에는 카레를 만들고 싶다. 감자를 평소보다 더 많이 넣고, 고기는 소고기가 좋겠다. 언제나처럼 양파를 볶아서 캐러멜라이즈하고, 감자와 고기를 넣어 볶고, 뭉근하게 푹 끓여서 진해진 카레를 흰쌀밥과 함께 식탁에 내고 싶다. 그리고 그날만큼은 설거지는 내가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이전글 애견 카페의 상주견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