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낭만제주] 그곳의 느낌 그리고 동네가 주는 쉼의 의미
전 날 내린 비로 안개가 자욱했다. 비 덕분에 귤나무로 둘러 쌓인 숙소에서 맞는 첫날 아침은 상당히 몽환적이었다. 이 날도 어김없이 아침 일찍 눈을 뜨고 숙소 밖으로 나아가 주위를 산책하고, 잎사귀 끝에 몽글몽글 맺힌 빗방울을 카메라에 담고 돌아왔다. 그러고는 방으로 들어와 즐겨 듣는 라디오 음악에 기대 책을 읽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나의 오래된 습관이기에 주말에도, 여행지에서 조차도 늘어지게 자본 적이 거의 없다. 내 이런 습관의 가장 좋은 점이라면 혼자만의 아침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일찍이 일어나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동네 산책도 하고, 음악을 들으며 깊은 사색에 빠질 수도 있다. 게다가 잠 때문에 숙소에서 제공하는 맛있는 아침을 절대 놓칠 리 없다. (나의 여행 메이트가 늘어지게 자는 사람임에 감사하며)
그렇게 평온한 아침시간을 보낸 뒤, 가고 싶었던 '그곳'으로 향했다.
'나를 제주로 다시 이끈 그곳의 지금은 어떤 느낌일까, 이번엔 나에게 어떤 감정으로 다가올까?' 하는 부푼 기대를 안고 그곳으로 향했다. 비가 내려 습하고 안개가 자욱한 분위기를 최대한 느끼기 위해 천천히 걸으니, 일상에서 온전히 벗어난 것을 더욱 실감했다.
그토록 오고 싶었던 공천포 해안가에 위치한 작은, 샛노란 사각형의 주택을 최소한으로 개조한 듯한 느낌의 카페이다. 우리 집 방문을 연상시키는 나무로 만든 입구와 그 옆에 보일 듯 말 듯 조그맣게 달린 간판 때문에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이 곳이 카페인 줄 모르고 지나칠 수 있을 것 같다. 나무 문에 달린 동그란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 때의 뻑뻑한 느낌이 더욱 포근하게만 느껴졌다.
문을 열면 연노랑색의 페인트가 곱게 칠해져 있는 아기자기한 카페 내부가 보인다. 카페 안은 나무 재질로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라 나무 특유의 냄새가 난다. 이 곳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느낌이다. 이 날은 비가 내려 더욱 습한 탓에, 습한 기운이 나무 특유의 냄새를 더욱 진동하게 했다. 좌석도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앉을 수 있는 큰 테이블 하나와, 주위에 조금의 2~3인용 테이블이 전부이다. 여기저기 창문 사이로 공천포 바다가 훤히 보이고, 벽면에는 동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예쁜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주인장 고유의 감성만이 존재하는 이 곳, 그 이유 때문에 여기만 오면 일상을 벗어나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멈춘 시간 속에서 조용히 여행하는 기분이다.
늘 이 곳을 방문할 때마다(그래 봐야 세 번째 방문이지만), 공천포 바다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가장 큰 창문 옆 2인 테이블에 앉는다. 창문 사이로 보이는 고요하지만 힘차게 일렁이는 파도, 누군가가 정성스레 하나하나 붙여 만들었을 바다를 감싸고 있는 자갈 벽, 창가 너머로 살짝이 보이는 카페 주인장 소유로 추정되는 자전거의 가죽 손잡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느린 걸음을 관찰하는 것이 좋다. 게다가 늘 방문할 때마다 어김없이 나오는 노 리플라이의 곡이 나오면 여느 콘서트장 못지않다. 챙겨간 책을 펴지도 못할 만큼 노래와 풍경에 흠뻑 빠져버린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두 시간 남짓 천천히 시간이 흘렀을까, 이 곳에서의 감상을 조용히 접고 카페를 나와 해안가를 조금 걸은 뒤 허기진 배를 채우러 근처 식당에 들렀다.
근처 식당에서 적당히 끼니를 해결한 뒤 동네 산책을 조금 더 한 뒤에, 숙소로 돌아오니 오후 두 시 정도가 되었을까. 일상에서는 참 지루하고 더디게만 흐르던 시간인데, 여기에서는 모든 것들이 천천히 그리고 모순되지만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아까 펴지 못했던 책을 창가에 기대 읽기 시작했다. 빗방울 소리에 습한 공기가 주는 포근함에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시계는 저녁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갈 채비를 하고 저녁을 먹기 위해 시장으로 향했다.
이로써 우리 여행의 셋째 날이 내일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