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들의 천국?

by mercioon



내가 가장 많이 간 도시 중에 하나가 아마 포카라일 것이다.

돼지고기, 소고기도 없고, 술집도 없는 인도( 그중에는 채식만 가능한 도시도 있다!)를 여행하다 네팔로 넘어간 여행자들에게 포카라는 그야말로 여행자들의 천국이다. 하지만 첫 여행으로 일정에 있지도 않던 네팔로 도망치듯이 넘어간 포카라의 상황은 천국이랑은 거리가 멀었다.


때는 너무나도 오래된 2006년. 네팔은 독재 왕권을 가진 정부와 이들에 대항하는 마오이스트로 결성된 반정부군의 싸움으로 정세가 어지러운 상태였다. 인도 여행만 계획하고 왔던 터라 당연히 그 사실은 알지도 못했고, 도착했던 그날의 포카라도 잠시 스트라이크*가 풀려있는 상태여서 심각한 상황처럼 보이진 않았다.

한산하긴 했지만 인도의 지옥 같은 교통을 겪다가 온 포카라는 평화로워 보였고, 숙소는 저렴하면서 몇 배는 더 깨끗하고 따뜻한 샤워를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히말라야의 멋진 풍경을 바라보며 스테이크와 맥주를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은 포카라를 왜 여행자들의 천국이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이었다. 맥주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술을 골라 마실 수 있는 건 옵션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포카라가 해마다 수많은 여행객들이 안나푸르나 등산을 위해 찾는 도시인지도 몰랐다. 포카라란 도시조차 처음 들었으니,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며 푼힐 전망대를 알리 만무했다. 하루 이틀 쉬며 낮에도 맥주를! 저녁에도 맥주를! 에베레스트 맥주 예찬론자가 되어 매일 맥주를 마시며 포카라를 즐겼다. 그렇게 며칠이나 맥주 마실 구실을 만들던 중 포카라로 같이 넘어왔던 일행 중 한 명이 생일이라 다 같이 모이게 됐다. 그 자리에서 한 명이 안나푸르나 등산을 같이 가자고 제안해왔다.

북한산 한번 타보지 않은 나였지만, 이십 대의 호기로운 여행자이자 일행 중에 막내였기에 무서울 게 없었다. 언니, 오빠들의 꼬임에 넘어가 몇 날 며칠 타야 되는 고된 산행 인지도 모르고 에베레스트 맥주를 치켜들며 까짓 히말라야 타보자며 해맑게 건배를 외쳤더랬다. 그래 봤자 한두 살 차이, 유치한 나이의 우리들은 잔뜩 오른 취기에, 인도에서 가져온 헤나로 각자의 팔에 안나푸르나 1호, 2호, 3호, 4호를 새기며 앞으로의 고된 산행으로 얼마나 울어재낄지 생각도 못한 채 한껏 달떴다.


다음날. 오전 내내 술독에서 허우적대다가 겨우 쓰린 속을 달래며, 퍼밋을 신청하고 한식당에서 해장을 하고, 산행에 필요한 장비들을 빌리기 위해 좀비처럼 포카라의 거리를 휘젓고 다녔다. 지금은 인증된 포터들이 있어 가이드나 포터를 의무적으로 고용해서 가는 추세이지만, 15년 전 포카라는 인증된 포터가 없이 아무나 포터를 할 수 있던 시기였기에 포터가 가해자가 되거나, 반대로 포터가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속출할 때였다.

포터의 개념도 잘 모르고, 돈도 없는 가난한 여행자였던 우리는 과감히 포터 없이 산행을 가기로 했다.

제일 먼저 커다란 접이식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안내 지도를 사고, 꽤나 고퀄리티의 가짜 콜롬비아 바람막이와 등산바지를 구입했다. 문제는 등산화였다. 등산화를 사기에는 여행 막판의 가난한 여행자였고, 산행이 끝난 뒤엔 한국으로 갈 예정이라 사야 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반복되는 스트라이크로 대부분의 가게들이 문을 닫아 그나마 문을 연 상점 주인들이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불러댔다. 우리 일행은 등산화를 대여해서 신기로 하고 상점들을 돌며 등산화를 빌렸다. 문제는 내발 사이즈에 꼭 맞고, 편한 등산화는 찾기 힘들다는 것. 포카라 시내를 몇 바퀴는 돌고서야 대충 발에 맞는 듯한 아주 허름한 등산화 하나를 겨우 빌릴 수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등산이 장비 발이라는 것을.

제대로 된 등산 용품도 없이 짝퉁 바람막이에 바지, 허름한 운동화와 짝퉁 레이밴 선글라스만 대충 구비하고,

신났다고 산에서 마실 술을 사러 가서 생각도 없이 병으로 된 보드카를 하나 챙겼다.


산을 타기 전날 저녁, 한식당에 모여 한식당 사장님과 술 한잔을 하며 주의할 점을 들었다. 보통 때면 크게 주의할 일 없이 산을 타도 되지만, 며칠 전에 반정부군이 죽는 사건으로 정부군과 반정부군인 마오이스트 사이에 긴장이 한껏 고조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마오이스트들은 활동 자금을 산을 타는 등산객들의 주머니를 털어 마련했던 터라, 산을 타는 중에 무조건 한번 이상은 만나게 될 것이니 돈을 달라면 달라는대로 다 주라고 하셨다. 점점 심각해지는 우리의 표정에 사장님은 그저 최고의 운은 하산하는 길에 돈을 빼앗기는 것뿐이라며 행운을 빈다고 하셨다. 하긴 오르는 중에 빼앗기면 빼도 박도 못하고 하산해야 하는 상황이니, 제일 좋은 경우는 산을 다 타고 이미 가벼울 대로 가벼운 주머니가 한층 더 가벼워지는 마지막 날에 만나길 비는 것뿐. 이십 대의 호기로운 여행자들은 잔뜩 겁을 먹었지만, 어쩌겠는가. 우리는 산에서 마시기 위해 각자 마실 술까지 다 챙긴 것을.



네팔의 심각한 정치적 상황을 몰랐던 나는 내 인생에서 top 3안에 드는 개고생을 하게 된다.



*스트라이크 :노동 조건의 유지 및 개선을 위하여, 또는 어떤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노동자들이 집단 적으로 한꺼번에 작업을 중지하는 일.

*포터 : 호텔이나 역 등지에서 손님의 짐을 날라다 주고 팁을 받는 사람

*마오이스트 :네팔 공산당 모택동주의자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네팔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