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줌마 관찰기>
버터 1파운드,
또는 넣고 싶은 만큼 넣어라.
- William Penn Jr.
어머니의 조리법/1702
나는 타고난 미식가다.
그 보증은 우리 엄마가 한다.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 한다는 말 다음으로 많이 들은 말이니 아마 팩트일 거다.
엄마는 음식 솜씨가 좋았다. 제철요리 전문가 자격증이 있다면 1급 프리패스 상이다. “이 계절에는 이걸 먹어야 힘이 나.” 소리를 일 년 사계절 돌아오는 절기마다 들으며 철에 맞는 밥을 먹고 컸다.
봄에는 냉이 달래 주꾸미 여름에는 옥수수 감자 열무 또 가을 겨울의 이것저것들이 힘이 되어 그 계절들을 모두 건넌 나는 튼튼한 아줌마가 되었다. 요리라고는 하나도 할 줄 모르고 입만 고급인 아줌마.
철마다 나는 재료로 요리해 먹는 거 그게 별거냐 살림하는 집은 다 그렇지 생각했는데 아줌마가 되고 보니 아니었다. 때에 맞는 재료를 공수해다가 맛깔나게 반찬을 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친정에 다녀올 때 타파웨어에 밑반찬을 꽉꽉 채워 받아와도 데워먹으면 어쩐지 그 맛이 안 났다. 조물 조물 무쳐 식탁에 내기 전, 갓 짜 온 들기름 떨구어 향을 입힌 것과 냉장고에서 꺼내 렌지에 1분 30초 빙 돌린 음식이 같을 수는 없었다.
처음 한두 번 꺼내어 먹다가 절반을 못 먹고 번번이 쓰레기통으로 가기 일쑤였다. 얼마 가지 않아 음식 버리는 게 아까워 더는 못 받아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꾹꾹 눌러 담아 준 제철 파워와 헤어질 때가 된 것이었다. 마침내.
우리 집엔 새로운 파워가 필요했다.
수많은 인재들이 머리를 맞대고 밤을 새워 연구해 완성한 극강의 레시피. 믿을 수 있는 품질. 한결같은 맛. 대기업 파워에 기대어 밥상을 차려냈다.
은색 봉지를 찍 뜯어 들들 볶거나 데우기만 하면 되었다. 물론 미리 갖춰둔 채소들을 추가하는 센스.
대기업 파워는 우리 가족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메뉴는 절기보다 더 다채로웠다. 대형 마트에서 종류별로 사다가 쟁여두면 저녁 걱정 없어 든든했다.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서 메뉴를 정했다. 스트레스 팍팍 받은 오늘은 너로 정했다 하바네로 매콤 불낙지!
먹는 시간보다 요리하는 시간이 더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한 시간 반을 들여 저녁을 준비했는데 맨밥에 딸랑 반찬 하나라니 거기다 먹는 데는 15분이면 차고 넘치니 어쩐지 계산이 안 맞는 느낌이었다. 장보는 시간에 설거지 시간까지 포함하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대기업 파워는 이런 소모적인 시간들을 대폭 줄여준다는 점에서 실로 합리적이었다. 그렇게 벌어낸 얼마간의 시간으로 가족과 오순도순 보내리라.
우리는 하바네로 매콤 불낙지를 십분 안에 비벼 먹고 동네 산책도 하고 달콤한 후식도 사 먹었다.
그런데 하바네로 파워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남편의 건강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아마도 하바네로 탓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건강검진 결과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것은 남편보다도 오히려 나였다.
약물치료와 더불어 식이조절과 스트레스 관리가 필요하다는 결과를 전해받는 순간 귀에서 잉-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니 이게 왠 이비에스 명의 같은 소리야.)
의사는 치료가 잘 되지 않으면 약간의 기능 장애를 가지고 생활해야 한다고 했다. 보조기구나 시술도 있지만 완전하지는 않다고도 했다. 처음엔 짜증이 났고, 다음에는 화가 났고, 그다음에는 숙연해졌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약간 울었다. 참담했다.
건강 검진 결과를 듣기 몇 주 전, 나는 볼일 때문에 광화문 한복판에 있는 호텔에서 묵게 되었다. 그날 배정받은 룸은 조계사가 한눈에 보이는 뷰였다. 다만 새벽에 타종 소리가 거슬릴 수 있다고 직원은 미리 일러주었다.
이윽고 새벽 네시, 댕- 울려버린 타종소리에 눈이 떠졌고, 홀라당 잠이 깨버려 어쩔 수 없이 창밖으로 훤히 불 밝힌 조계사를 한참동안 멀뚱히 바라보았다.
밤의 한가운데 칠흑 같은 광화문 마천루 사이 금빛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조계사.
수능 시즌이었다. 그 안에는 정성으로 기도하는 아줌마들이 있었다. 검은 새벽을 뚫고 찾아와 앉았다 일어났다 수없이 반복하며 기도 올리는 저 마음은 대체 뭐란 말인가? 헤아려 보려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종교가 없는 나로서는 더더욱 알 길이 없었다.
그날의 그 생경했던 조계사 풍경이 떠올랐던 것은 왜일까?
나도 기도가 필요했던 걸까? 우리 남편 좀 낫게 해 달라고? 그렇다면 누구에게 기도를 하지? 기도 하면 진짜 들어주나?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해봐? 물고 무는 상념의 꼬리들.
결국 교회에 가는 대신 시장에 가기로 했다.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한테 꿀밤 맞으려나.) 여하튼 헌금 봉투 대신에 장바구니를 들고 매일 시장에 간다. 가서 제철에 나는 재료를 사 가지고 집에 돌아온다. 재료를 다듬어 지지고 볶고 굽고 삶는다. 의욕만으로 되는 게 아니어서 무척 허둥지둥한다. 남편이 먹더니 이야~ 우리 와이프 요리는 재료도 좋고, 정성도 들어갔는데 맛이 없네하고 디스해도 왕! 물지 않고 품에 비해 먹는 건 금방이라고 따지지도 않기로 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요리한다. 어차피 입만 고급이었지 내 요리가 꽤 후지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 부담이 날아갔다. 다만 기쁜 마음으로 요리한다.
시장에서 사 온 재료를 자주 오래 바라본다. 자주 오래 바라보고 바라는 것. 여기서부터가 제철 파워의
시작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