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을 하면서 스트레칭을 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몸의 근육에서 고무줄 같은 탄력을 느낀다.
신기하다.
상담에서 사람들이 마음이 유연해지는 것에 신기하다고 할 때마다
' 원래 마음은 그런 속성이 있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몸도 그러했다.
내가 잘 모르는 몸의 세계를 잘 아시는 분들은 그러실 것 같다.
" 원래 근육은 그런 탄력성이 있어요! "
이제야 내담자들이 신기해요!라고 했던 그 느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내 몸에 이런 탄력이 있었다니!
특히나 어깨와 등 근육, 그리고 엉덩이 뒤쪽 근육이 늘어나는 느낌은 정말이지 내가 잘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라서 신기하다 못해 감탄하게 된다. 고무줄이 천천히 늘어나는 것 같은 그런 탄성을 느낄 때마다 놀랍고, 동시에 아,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몰려온다.
내담자들이 아쉬워하는 그 지점과도 유사하다. 그럴 때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되었다고 했지만, 그 말이 그다지 좋은 반응이 아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쉬움을 덮어버리는 말이 될 수도 있으니까.
아쉬움은 지우는 게 아니라 같이 아쉬워하는 것. 그렇게 애쓰고 버텨서 보내온 세월들에 대해 함께 마음 아파해 주는 것. 그때 했던 최선의 방법들이 안타깝게도 최선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 건 분명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근육의 탄력성은 운동하고 늘리고 회복하면서 달라진다. 그렇다면 마음의 탄력성도—회복탄력성(resilience)도—훈련을 통해 조금씩 늘어날 수 있는 것 아닐까.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무작정 세게가 아니라 규칙적으로, 조금씩, 회복과 함께. 그리고 무엇보다 감각을 알아차리며.
마음도 비슷한 방식으로 길이 난다. 강제로 회복하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속도와 속성에 맞게 단계적으로 이완해 나가는 것. 적절한 긴장과 이완을 오가면서 근육을 풀어주듯, 마음도 그런 사이를 오가면서 배운다.
언젠가 상담에서 한 내담자가 빨리 회복하지 않는 자신을 답답해했다. 그에게 말했다.
"자신의 속도가 있어요. 천천히, 부드럽게 그 과정을 밟아가면 돼요. 너무 빨리 회복해야 한다고 재촉하면 마음이 더 힘들 수도 있어요. 구겨진 걸 강제로 피려고 하면 오히려 더 상할 수 있어요."
그러자 내담자가 말했다.
"아,그게 소성변형(plastic deformation)이라는 개념이에요. 공대에서는 그렇게 풀어요. 고무줄도 너무 세게 당기면 늘어난 채로 돌아오지 않거든요. 마음과 물질이 유사하네요."
내가 잘 모르는 물질의 세계를 잘 아는 그가, 내게 가르쳐준 순간이었다.
그렇다. 자신만의 속도대로.
하루에 한 번, 아주 짧게라도 "지금 내 몸은 어디가 긴장했지?" 묻는 것. 감정이 올라올 때 해결부터 하려고 하지 않고 "아, 지금은 당연히 힘들지" 하고 먼저 붙잡아주는 것. 무너진 날을 지우려 하지 않고 다음 날을 회복의 날로 만들어보는 것. 혼자 버티지 않고 회복을 돕는 사람과의 연결을 유지하는 것. 완벽을 목표로 하기보다 다시 돌아오는 속도를 조금씩 단축해가는 것.
결국 탄력성은 안 무너지는 게 아니라 무너져도 돌아오는 거였다.
몸이 그걸 보여준다. 늘어나는 만큼 다시 돌아오는 감각.
그 감각이 쌓이면 내 몸은 더 부드러워지고, 내 마음도 조금 더 유연해질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나는 요즘 수영장에서, 회복탄력성을 몸으로 배우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내담자들도, 각자의 속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