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설명이 필요 없는 강력한 추동 세력이에요. 삶에는 설명이 필요 없어요. 태어난 것 자체가 행운이고, 그래서 내가 생명을 얻고 그게 이틀이 되었건 80년이 되었건, 살아 있는 그 순간이 축복인 거예요. 그래서 축제인 거죠. 그러니 삶을 즐기세요. 의미 찾지 말고 ‘생각’이라는 끔찍한 질병에서 벗어나서 축제를 즐겨라.”
인스타그램 릴스를 둘러보다가 너무나 멋진 말을 마주쳤다. 80대의 점잖은 노인은 생각을 병으로 치부하고, 삶은 그 자체로 우리를 움직이는 힘이니 구태여 의미를 찾지 말고 즐기라고 말했다. 이 이상주의적 가르침은 내게 감동을 주었지만, 그 감동은 단 몇 분도 지속되지 않았다.
이러한 허울뿐인 가르침은 삶의 곳곳에 도사린 어려움을 부정한다.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는 늘 불충분하지만, 그럼에도 삶은 설명을 요구할 때가 반드시 온다. 삶의 의미를 묻지 않았다면, 그는 의미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고통스러워 보지 않았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이 노인의 깨달음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으나, 삶의 의미를 찾고 생각한다는 것은 자신의 고통이 인생에서 헛되지 않기를 바라는 발버둥이다. 자신의 에너지가 이 고통에서 소진되었다는 것을 언어로 번역하는 행위이기에, 그것은 병이라기보다 ‘회복에 대한 갈망’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짐승으로 태어나지 않았고 언어라는 도구로 사고하는 인간이다. 그렇기에 그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끔찍한 질병’을 타고난 종인데, 이는 짐승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정상 상태인 것이다. 불행한 이들에게 태어난 것이 행운이라고 말하는 것, 겨우 살고자 밥을 목구멍에 밀어 넣는 이들에게 축제 같은 삶을 즐기라는 말은 기만일 뿐이다. 설명이 필요 없는 것은 ‘출생’이지 ‘삶의 지속’이 아니다.
내가 이 말에 과도하게 반발하는 이유는 아름다운 단어들의 조합이 많은 것을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에 의해 끌려가는 존재가 아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을 깜빡이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있지만, 고통이 임계점에 다다르면 ‘죽음’이라는 선택지가 생기고 삶과 죽음 사이의 양자택일 순간이 온다. 삶은 어떻게든 굴러갈 때가 있지만, 죽음을 선택하고 싶은 의지 또한 인간에게 존재한다. 그때, 삶은 더 이상 그 자체로 추동 세력이 아니다.
2023년 11월 27일, 나는 내가 가진 신경안정제를 세어보았다. 현실로 다가온 죽음의 문턱 앞에서 나는 햄릿의 질문을 던졌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때의 나는 앞으로의 생을 견딜 힘도 없었지만, 죽음이라는 미지로 향할 만큼의 용기도 없었는지 일단 죽음을 유보하고 그날만은 ‘사는 것’을 선택했다.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선택에 대한 책임을 안고 살아간다. 이후 나는 죽음에 대한 충동이 드는 매 순간의 양자택일에서 삶을 선택했다. 그것은 내가 선택한 삶에 대한 책임을 요구했으며, 나의 삶이 기능하게 하라는 스스로를 향한 지시였다.
나는 많은 이들이 갖는 삶의 종결에 대한 동기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다. 개인적인 사정이나 감정을 완벽하게 알지는 못하나, 그 괴로움만큼은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에 책임 없이 아름다운 문장으로 “살아보자, 인생은 생각보다 아름답다”와 같은 말은 할 수 없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죽음이라는 선택을 유보했다면, 잠시라도 삶을 선택했다면, 그 선택에 대한 책임감으로 삶을 한 번쯤 굴려보는 시도는 해보자고 이야기하고 싶다.
물론, 내가 삶을 선택했다고 해서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것은 없었다. 삶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이 내게 주는 고통을 수용하겠다는 선택이었기 때문에, 살아내는 과정에서 삶과 고통의 의미를 찾는 질문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수천 년간 대단한 철학자들이 고민했음에도 답을 알아내지 못한 것처럼, 나로서도 도저히 답을 알 수 없는 문제였다. 삶이라는 것은 ‘살아있음’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동어반복일 뿐이라는 미궁은 우리를 더욱 괴롭게 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는 ‘선택하는 방향’으로 시야를 돌린다는 점이다. 죽음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와 비슷한 생각과 그 소망을 강화하는 모든 감정과 생각을 흡인한다. 반대로 삶을 바라보면 회복에 대한 길이 보일 수 있다.
무언가에 대한 자발적 책임감은 분명한 사랑의 형태라고 생각한다. 죽음에 대한 선택이 자신의 고통을 멈추려는 소극적 ‘자기애’의 한 종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삶의 지속을 선택하고 그 책임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적극적인 ‘자기애’가 아닐까.
나는 매 순간의 삶의 선택이라는 사랑의 씨앗으로 자신을 돌보고 양육해보려 한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고 말하는 부모의 마음으로 말이다. 사랑은 채찍질이 아니기에, 제대로 살아보라며 스스로를 닦달하지 않을 셈이다. 죽음의 문턱을 넘은 나의 아이를 다시 기르는 마음처럼, 나를 아껴볼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