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다소간 정신이상이고 다소간 잠자고 있다.

― 정상이라는 이름의 착각에 대하여

by 메리

이번에 나의 생일파티를 하면서 친구와 만나 다투게 된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정신병자‘라는 말에 대한 이미지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나도, 나의 친구도 정신병에 대해 옳은 개념을 사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사고가 비틀린 누군가에 대해 정신병이 아니냐 물었고, 나의 친구는 맥락도 없이 왜 그렇게 강한 워딩을 쓰는 거냐고 이야기했다. 사실 나의 감정은 진짜였으나, 나는 ‘정신병’이라는 단어가 반드시 금기어처럼 취급되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전에 사귀던 사람에게 심적으로 너무 괴로워 정신과에 가보고 싶다고 했더니 그런 곳에 왜 가냐며 노발대발했던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오랫동안 남아있다. 그리고 그 기억을 나의 친구가 트리거처럼 눌러버린 것 같다. 정신과 병원과 친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정신병원을 사이코와 히스테릭한 인간들이 모여 약을 받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정신과에 가보면 대기실의 풍경은 버스나 카페처럼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공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만큼 평범하다는 뜻이다.


정신과에 대한 오해는 이뿐만이 아니다. 정신과 약은 뇌에 안 좋으니 먹지 마라, 의지가 약해서 그렇다, 운동하고 긍정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면 다 나아진다. 이런 말은 정신질환이라고 진단받은 사람들이 자주 듣는 이야기다.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통제가 어려워 치료를 받는 사람에게 왜 의지와 강함을 요구하는지 묻게 된다. 우울증부터 조현병, 기분장애에 이르기까지, 병을 진단받은 이들은 병식을 가지고 정신과에 가서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으며 노력하는데 말이다. 물론 이들 중에도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 고통은 먼저 자기 자신을 향한다. 반면 성격이 나쁘거나 편협한 태도로 타인을 상처 입히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진단대에 올려놓지 않는다. 이는 병이 없다는 뜻이라기보다,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뜻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정신질환자라고 진단받은 이들의 사고나 행동에는 오류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정신질환에 대한 이미지는 대개 스펙트럼의 극단적인 장면만을 떠올리며 만들어진다. 극단의 일부를 전체로 오해하는 셈이다. 어쩌면 나는 이 오해를 조금 더 예민하게 감지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내가 조울증 2형으로 진단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정신과에 다녀본 적 없는 사람들보다 그 언어에 조금 더 가깝다. 나는 진단을 받은 이후 타인의 편협함이나 과도한 공격성을 볼 때, 단순히 ‘성격이 이상하다’고 단정하기보다 혹시 그 사람의 기능 어딘가가 무너져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과도하게 병리적으로 해석한 면도 있다. 그러나 그 관점은 적어도 나로 하여금 사람을 덜 미워하게 했다. 그들이 우리에게 주는 피해가 ‘악의’라기보다 ‘어떠한 사고 기능의 부재’ 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질환은 약이나 치료로 완화되거나 회복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성격이나 기질, 가치관은 비교적 고착되어 있어 변화가 쉽지 않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물론 성격 역시 변화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울증을 진단할 때는 “평소와 달라진 상태”에 주목한다. 2주 이상 식욕이 달라졌는가, 수면이 무너졌는가와 같은 질문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안구건조증으로 인해 시력이 일시적으로 흐려진 사람은 그 원인을 치료하면 다시 또렷해질 수 있다. 그러나 본래 시력이 낮은 사람은 안경이나 수술 같은 보조가 필요하다. 문제는 자신이 흐리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때다. 자신이 보는 뿌연 세계가 전부라고 믿는 순간, 왜곡은 수정될 기회를 잃는다.


정신과에 대한 편협한 이미지는 실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치료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사실과 자신의 신념 사이에 큰 괴리가 있음에도 전문의보다 자신의 판단을 우위에 두는 태도는 위험하다. 내 친구는 우울증으로 자해 증상을 겪고 있었는데, 그녀의 남자친구는 약은 몸에 좋지 않으니 끊으라고 말했다. 죽음의 위험 앞에서 약의 부작용만을 강조하는 태도는 무엇을 보호하려는 것일까. 이러한 일은 친구, 연인, 가족 사이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정신이 괴로워 일상이 무너진 이들에게 아무런 의학적 지식도 없이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말자. 그것은 도움이라기보다, 자신의 확신을 과시하는 행위에 가깝다.


그들의 문제는 정신을 강함과 약함의 기준으로만 재단하는 데 있다. 병식을 가지고 도움을 구하는 사람을 멘탈이 약하다고 말한다. 나는 오히려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태도가 더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약함을 인정할 때 더 강해지기도 하는 법이니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비교적 덜 극단적인 환경에서 살아왔을 수도 있고, 아직 자신의 취약성을 마주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것이 우월함의 증거는 아니다.


우울증이나 여타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들이 맑은 사고를 하지 못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지능이나 재능과 정신질환은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 사고의 타당성이나 논리의 정합성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특정 진단을 이유로 그 사람의 주장 자체를 무효화하는 태도는 합리적이지 않다. 오히려 자신의 편협함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모든 인간은 부족함과 결함을 가지고 있다. 신체의 질병이 스펙트럼을 가지듯 정신적 취약성 또한 연속선 위에 존재한다. 만약 당신이 특별한 정신과적 진단 없이 안정적인 사고를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좋은 기질을 타고났거나 환경이 비교적 덜 거칠었을 가능성도 낮지 않다. 우리는 생각보다 운의 영향을 많이 받으니 말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은 진단명이 없어도 문제다. 우리는 병을 가진 사람을 쉽게 비정상이라 부르지만, 타인의 경계를 침범하는 사람은 ‘성격’이라는 말로 넘겨버린다. 나는 우리가 가진 정신질환에 대한 이미지가 조금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낙인이 줄어들 때,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이 더 빨리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다소간 정신이상이고 다소간 잠자고 있다. 우리는 모두 세계에 대한 비객관적 견해, 곧 우리의 자아도취적 방향에 의해 왜곡된 견해를 갖고 있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