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거 있는 자신감은 깨지기 쉽다

인간은 존재 자체로 가치 있는가

by 메리

근거 없는 자신감이 중요하죠, 근거가 있는 자신감은 너무너무 연약해요. …

자신감에 근거를 두다 보면 금방 깨지거든요. 대학원에 가고 박사 후 연구원을 하고 그러면은 세상에 나가보면 그런 사람들 많고 내가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구나 이런 것을 어느 단계에 가면 크게 깨닫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그거를 자기 자존감의 원동력으로 삼으면 언젠가 한 번은 힘든 시기를 겪을 수 있으니까 좀 더 본질적인 데에서 자양분을 끌어올리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유퀴즈, 필즈상 수상자 허준이>


작년 가을쯤이었다. 아등바등, 그리고 꾸역꾸역 버티다가 결국 직장 내 성희롱으로 일을 그만두고 노동청에 신고한 뒤였다. 나는 어느 날, 견딜 수 없는 현실의 무게로부터 휴식하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여전히 자신에 대한 채찍질을 멈추지 않았고 그날은 몇 시간이고 이유도 모른 채 꺽꺽 울었다. 그러던 중 유튜브에서 우연히 허준이 교수의 말을 들었다.


”근거 있는 자신감은 깨어지기 쉽다. “

이는 아마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흔히 세상은 어디에서나 자존감을 높이라고 소리친다. 그렇다면 자존감은 무엇일까? 현대 심리학의 선구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자존감을 ‘우리가 기대하는 목표에 비해 실제 성취가 어느 정도인가’로 설명했다. 또한 알랭 드 보통은 자존감을 ‘세상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와 결부시켜 이야기한다. 이는 자존감의 두 축인 자기 효능감과 자기 가치감 중 자기 효능감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자기 효능감은 성취, 그리고 타인의 시선과 맞닿아 있다. 반면 자기 가치감은 능력이나 성취와 무관하게, ’ 나는 살아 있을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에 대한 감각이다.


그러나 나는 자존감이 단순히 이 두 가지로 나뉘는 구조라기보다, 하나의 순환 구조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자기 가치감이라는 것은 자기 효능감이 서있을 수 있는 기반이며, 자기 효능감은 다시 그 기반을 강화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실패했을 때 스스로를 용서하고 다시 일으킬 수 있는 태도, 즉 자기 자비가 놓여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자기 가치감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세상은 가끔 따뜻한 말을 전하고 싶을 때 종종 이렇게 이야기한다. “당신은 존재 자체로 가치 있는 사람이에요.” 의도는 알겠으나 나는 그 말에 쉽게 공감할 수 없었다. 당신이 나에 대해서 무엇을 안다고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는가. 내가 많은 사람을 죽인 연쇄살인범이거나, 해를 끼치는 존재로 살아왔다고 해도 가치 있다고 말할 텐가. 의도는 감사하나 동시에 부가설명 없는 참으로 무책임한 위로이다.


사실 생물학적으로만 보자면, 지구에서 인류의 필요성은 겨우 종의 존속에 있다. 우리는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세계의 일부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단, 존재 자체만으로 가치 있다는 판단은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는 최소한의 가치로써 우리는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가치를 ‘존재‘가 아니라 ’ 가능성‘에서 찾고 싶다.


지금 처한 현실과는 무관하게, 우리가 될 수 있는 수많은 방향인 우리의 ’ 가능태’는 지금의 나로는 가늠할 수 없는 방향으로 열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우리의 실패를 용서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 무한한 ‘가능태’에 닿기 위해선 지속과 용서는 필요조건이 되니 말이다. 결국, 존재 자체로 가치 있다는 말은 ’ 너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라는 사실 확인 아닐까. 따라서, 존재 자체의 가치는 ‘이미 완성된 현재’가 아니라 ’ 변할 수 있는 구조‘인 미래에 있다.


이는 거진 신념이고 믿음이다.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의 반석에서 자기 효능감이 자라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의 가능성을 믿지 못한 채, 과거나 현재의 성취, 그리고 과거의 결과물인 지금의 상태만으로 자신의 가치를 판단한다면 우리의 위에 서있는 수많은 이들의 기준에 짓눌려 또 다른 가능태에 대한 꿈을 꾸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가 무한하게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마치 종교처럼 맹목적으로 믿어야 한다.


따라서, 허준이 교수의 말처럼 우리는 가변적인 성취가 아니라 근거 없는 견고한 자신감 위에 설 필요가 있다. 그것이 기반이 되어야 성취에도 자신의 존재가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건강한 자존감이란, 불안을 동력으로 삼아 움직여 성취가 최종 판단의 잣대가 되는 것이 아닌, 내가 어디까지 변할 수 있는가에 대한 가능성과 끝까지 매일 넘어진 자신을 일으키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내가 전부가 아니라는 합리적인 판단과 믿음으로 스스로를 지탱하며 살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