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11일의 투쟁 : 자극과 균형

Love your perfect imperfections

by 메리

2022년의 나는 무엇이었을까. 지독한 조울의 줄다리기 속에서 어떻게든 균형을 잡으려 애쓰던 시기였나 보다. ADHD라는 기질이 만들어낸 경조증적 자극 추구와, 그 이면의 우울감 사이에서 평정을 찾기 위해 '자유'와 '방종'의 경계를 치열하게 사유하던 때였다. 3년 반이 지난 지금 돌아보니, 당시의 내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조금이나마 평온을 찾을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 '전환점'이라는 단어를 그리 신뢰하지는 않지만, 이 시기를 기점으로 내가 변화하려 노력해 왔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일종의 '전환곡선'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 보기에는 다소 서툴고, 삶의 답을 갈구한 나머지 단정적으로 내뱉은 문장 들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유라기보다 선언에 가까웠던 그날의 기록이 소중하기에, 이곳에 다시금 갈무리해 둔다.




Love your perfect imperfections


제목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고, 본문의 사진은 올 한 해 내가 지나온 풍경들이다. 현재 시각 새벽 2시 34분. 감성적인 글을 쓰기에 가장 적합한 시간이지만, 사실 감성이라기보다는 삶과 철학에 대한 지극히 이성적인 고찰에 가깝다.


어제 친구와 대화를 나누며 삶을 돌아보았고, 드디어 '답'이라 부를 만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평소 인간의 사고를 이성과 감성으로 이분하는 것을 꺼리지만, 기록의 편의를 위해 나누어 적어보려 한다. 최근 수개월은 나에게 대혼란기였다. 인생의 조타석에서 방향을 상실한 채, 이성적 판단보다는 감정과 자극에 휘둘리곤 했다. 오죽하면 사촌 언니가 나를 타인에게 '자극 추구의 끝판왕'이라 소개했을까.


나는 늘 자극을 갈구하는 사람이었다. 본능적으로 행복을 찾으려는 행위였다. 더 많이 갖고, 더 많은 경험을 하고, 호기심을 채우며, 더 자극적인 음식을 먹는 것. 마음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기쁨을 얻고 삶이 풍요로워질 것이라 무의식 중에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경험과 소유의 가짓수를 늘리고 그 수위를 높여봐도, 나는 끊임없이 더 강렬한 것을 원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쾌(快)'에 대한 갈구였을지도 모른다.


더 많은 것을 원할수록 행동은 거침없어졌다. 이성적 판단에서 벗어나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그 행동을 정당화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반복은 경향이 되고, 경향은 곧 나의 성격이 되었다. 자극과 정당화의 굴레 속에서 나는 자제해야 할 이유도, 스스로에 대한 통제력도 상실해 갔다. "이것도 경험이지"라는 말은 얼마나 위험한가. 세상에 경험이 아닌 것이 어디 있으랴. 삶을 지나치게 억압하는 것도 지양해야 하지만, '경험'이라는 명목하에 자신에게 방종을 허락하는 것은 더 위험하다.


인생은 외줄타기와 같다. 핵심은 밸런스, 즉 '중용'이다. 삶의 균형이 무너지면 그것은 곧 정신의 병증으로 귀결된다. "인간은 모두 어느 정도 정신병자다"라는 말을 10년 동안 가슴에 새기고 있다. 이토록 건설적이고 건강한 삶을 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릇된 경험은 인생을 오도하고 한 인간의 정신적 건강을 파괴하기도 하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강한 삶'은 참으로 모호한 개념이다. 오랫동안 답을 찾아 헤맨 끝에 이제야 제법 그럴듯한 결론에 도달했다. 물론 이조차 몇 년 뒤에는 '과거의 헛소리' 정도로 치부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찌 됐든 '건강함'이란 '균형'과 '담백함'에 맞닿아 있는 듯하다. 우리는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고 자극적인 음식을 피한다. 규칙적인 운동은 심미적인 목적도 있지만, 무언가를 지속할 수 있는 체력을 만들어준다. 담백한 식사는 장기의 부담을 줄이고 질병을 예방한다.


나는 이 원리를 영혼에도 적용해 보았다. '영혼의 운동'이란 나를 절제하고 성취감을 얻는 일체의 행동이다. 공부나 저축처럼 충동을 억제하고 지속하여 얻어내는 성취들 말이다. 수년 전 소중한 이의 죽음을 겪었을 때, 왜 인간은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지 고민했다. 지식을 얻으려면 고통스러운 공부가 필요하고, 건강해지려면 힘든 운동을 견뎌야 한다. 왜 모든 성취는 고통을 수반하는가. 여전히 명쾌한 답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제는 그 규칙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결국 건강한 삶이란 적당한 고통을 수용하고 그 과정에서 성취감을 얻는 과정이 아닐까. 불행히도 인간은 삶이 휘두르는 채찍에 맞설 '맷집'이 필요하다. 그 맷집을 기르기 위해 규칙적인 고통에 익숙해져야 하며 영혼의 체력을 길러야 한다. 또한, 마음의 건강을 위해 '밋밋한 음식'을 섭취해야 한다. 여기서 밋밋함이란 과도한 자극을 좇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자극적인 것에 길들여지면 뇌는 더 강한 자극만을 원하게 된다. 단조로운 일상 속 가벼운 일탈은 활력이 되지만, 쾌락에 조종당하는 삶은 파멸로 향한다. 자극은 서서히 판단력을 흐리고, 인간이 추구해야 할 본질적인 가치들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만든다. 나중에는 왜 그 가치를 지켜야 하는지조차 잊게 만든다.


여기에 필요한 것이 '경험의 미니멀리즘'이다. 이는 곧 자족하는 삶을 의미한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진 것에 눈을 돌리는 일, 그리고 내가 지나온 풍경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 풍경이 비록 늘 평온하진 않았을지라도, 분명 찰나의 기쁨들은 존재했을 것이다. 자족의 전제는 나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생은 역설적이게도 완벽을 추구할수록 나의 불완전함을 확대해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완전히 혼자라면, 내 행동의 책임이 오로지 나에게만 한정된다면 자극만을 좇는 삶도 하나의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가족이 있고, 연인이 있고,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면 그런 삶은 주변마저 파괴한다. '만족'이라는 단어의 유래 중 하나가 '물이 발목까지 차오른 상태'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나를 압도하여 가라앉히는 깊은 물이 아니라, 내가 충분히 제어할 수 있는, 그저 발 위로 찰랑거려 발등을 기분 좋게 적시는 수면의 높이 말이다.


건강한 삶은 곧 '행복한 삶'을 뜻하지 않는다. 사실 나는 행복이라는 신기루 자체를 믿지 않는다. 건강한 삶이란 적절한 심리적 고통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사랑이든 목표든 노력이 필요한 대상에 기꺼이 몰두할 수 있는 상태다. 신생아 시기를 제외하면 내 마음대로만 할 수 있는 시간은 없다. 모든 행동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 책임을 어깨에 짊어지고, 삶에 반기를 들지 않은 채 묵묵히 걸어가는 것뿐이다.


내 친구는 말한다. “삶은 그저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죽어가고 있지만 그렇기에 삶이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결과론적인 사고는 과정의 의미를 삭제해 버린다. 지금은 아무런 위로도 들리지 않겠지만, 하루하루 분투하는 너의 삶 자체가 이미 가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내 귀에는 닿지 않았던 그 외침을, 이제는 내가 나에게, 그리고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