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흘리며 카스테라를 먹는 마음

51점짜리를 선택한 나에게 100점을 주는 법

by 메리

필즈상 수상자인 허준이 교수의 ‘자신에게 친절하라’는 격언은 빠르게 온기를 전했다. 하지만 이 추상적인 단어는 내 삶에 적용하기 어려웠다. ‘친절’이라는 단어에서 무조건적인 수용, 즉 어떤 과오에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방임적 뉘앙스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과연 친절인지 방치인지 의문스러웠다.


그러던 중 신동엽의 일화를 접했다. 형편상 유치원에 갈 수 없었던 다섯 살 소년은 엄마에게 유치원에 보내달라고 했고 엄마는 월급날에나 먹을 수 있는 흰 우유와 카스테라를 사주겠다고 제안한다. 소년은 직감했다. 유치원에 못 가는구나. 그때 떼를 쓰며 거부했다면 우유도, 카스테라도, 유치원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소년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흰 우유와 카스테라를 끝까지 먹었다. 그는 훗날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 중 하나였다고 회고했다.


나는 이것이 ‘자기 자비’의 모범이라 생각한다. 49점짜리 손실을 아까워하기보다, 남은 51점짜리 선택지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반쪽짜리 선택일지라도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한 나를 인정해 주는 것. 인생에는 100점짜리 선택지가 없다. 언제나 무엇을 잃을 것인가의 저울질뿐이다. 결국 51점짜리 선택을 했던 하루였을지라도, 그 선택을 한 나에게는 100점을 주는 것이 자기 자비다.


많은 이들이 자신과의 대화를 강조하는 이유는 매 순간 주어지는 선택지의 미묘한 우위를 판단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충분한 내부 회의를 거쳐 나온 결론은 후회하기 어렵다. 그것은 근거 있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 자비는 자기 이해와 뗄 수 없는 관계다.


진정한 친절함은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 ‘절충’에 가깝다. 예전의 나는 ‘나에게 친절하라’는 말을 극단적으로 해석했다. 완전히 쉬어야 하고, 완전히 몰입해야 하고, 그렇지 못한 하루는 실패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 기준은 나를 회복시키기보다 오히려 더 지치게 했다. 완전히 쉬지 못한 날은 자책했고, 충분히 몰입하지 못한 날은 스스로를 비난했다.


그때 나에게 필요한 자비는 ‘마음껏 쉬어도 된다’는 허락이 아니라, ‘오늘은 이만큼이면 충분하다’는 냉정한 조율이었다. 쉬지 못했더라도 최소한의 휴식을 인정하고, 최선을 다하지 못했더라도 기능한 하루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나를 망치지 않는 친절이었다.


나에 대한 사랑 역시 그동안 너무 뜨겁기만 했던 것 아닐까. 완전한 휴식이나 완전한 몰입이라는 강렬한 온도 말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나에게서 조금 거리를 두고, 차가운 표정으로 말하려 한다. “오늘 쉬지 못했어도 괜찮아. 네 상황에선 완전히 쉰다는 것도 부담이잖아. 잘했어.” 누군가를 옳은 길로 이끄는 사랑에는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차가운 온도’가 필요하다.


자기 연민의 온도도 나에게는 지나치게 뜨겁게 느껴진다. 좋은 부모가 아이의 인생에서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듯, 자기 자비도 그런 거리감이 필요하다. 극단적 태도는 그 어떤 손실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욕심이다. 차가운 마음으로 손실을 받아들이고, 뜨거운 눈물을 삼키며 남은 카스테라를 먹는 것. 그것이 나를 향한 가장 깊고도 단단한 애정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