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적 물음 앞에서 무너지는 성취
이전 글에서 나는 ‘근거 있는 자존감은 쉽게 무너진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이야기는, 그 말이 어떻게 나에게 실제로 일어났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나는 그때, 분명 근거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기반은, 생각보다 훨씬 쉽게 무너졌다.
입시 실패가 남긴 지독한 우울 이후, 나에게도 꽃 피는 계절이 왔다고 믿었던 시기가 있었다. 대학교 3학년 무렵, 나를 지배하던 스트레스는 두 갈래였다. 여전히 머릿속을 맴도는 잔여 두통, 그리고 외모에 대한 강박적인 다이어트였다.
결국 나는 남들과 조금 다른 이유로 휴학을 택했다. 동기들이 스펙을 쌓거나 다채로운 경험을 위해 떠날 때, 나의 휴학 목적은 오직 '두통 치료'와 '다이어트'였다. 갈피를 잡지 못해 괴로워하던 통증의 정체는 '긴장성 두통'이었고, 꾸준한 스트레칭과 운동만이 유일한 해답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나는 이 고통을 끊어낸 뒤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 나를 괴롭혔던 또 다른 축은 외모 강박이었다. 객관적으로 못난 외모는 아니었으나, 자의식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졌던 시기였다. 길을 걷는 모든 이가 나를 지켜보는 것만 같았고, 세상의 모든 시선이 내게 꽂혀 있다는 착각에 시달렸다. 쿨하지 못한 완벽주의적 성격은 이 증상을 가중시켰다. 쇼윈도를 지날 때마다 나는 멈춰 서서 내 몸매를 훑었다. 몸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스키니진과 짧은 치마가 유행하던 시절, 나를 가릴 곳 없는 환경은 스트레스의 기폭제가 되었다.
독하게 매달렸다. 하루 두 번의 스트레칭, 두 시간의 근력 운동, 그리고 철저한 식단 조절. 결과는 달콤했다. 원하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크롭티와 하이웨이스트 스키니진을 당당하게 입으며 "말랐다"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복학 후 성적은 4점대를 기록했고, 토익 점수는 940점에 달했다.
그때 나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일상을 갉아먹던 두통은 자취를 감췄고, 성적표와 토익 점수는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할 만한 훈장이었다. 입고 싶은 옷을 마음껏 입으며 거울 속 나를 사랑하게 된 그때, 나는 위험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하면 된다. 나는 하면 되는 사람이다.’ 동시에 이 믿음은 타인을 향한 칼날이 되었다. 내가 해냈으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저 '안 하는 사람'일 뿐이라는 오만. 성취라는 확실한 '근거' 위에 세운 나의 자존감은 그토록 눈부셨고, 또 그만큼이나 교만했다.
그러나 이 교만은 오래갈 수 없었다. 단단하다고 믿었던 그 신념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그리고 처참하게 부서졌다. 내가 당시 얼마나 오만했는지, 이제는 부끄러운 고백을 해야겠다.
1년 반을 사귀다 헤어졌던 전 남자친구와 다시 연락이 닿았다. 그는 여전히 나에게 미련이 있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재회했다. 하지만 그와 이별하던 때의 나와, 성취에 취해 자아가 비대해진 당시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나를 붙잡으려 애쓰는 그의 모습은 과거보다 작아 보였고, 기형적으로 커진 나의 자만심은 그와의 간극을 좁히지 못했다. 그 비대해진 자아의 크기 차이는 서로에게 깊은 상처만 남겼다.
그 무렵 나는 그에게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오만한 질문을 던졌다.
“너, 내가 예뻐져서 다시 만나자고 하는 거지?”
지금 생각하면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말이다. 나는 겨우 살 몇 킬로그램이 빠진 것을 대단한 권력이라도 잡은 양 휘둘렀다. 외모와 성적이라는 가변적인 근거 위에 세워진 자존감은,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대신 타인을 깔아뭉개는 '오만한 무기'가 되어 있었다. 내가 예뻐졌기에 그가 나를 원한다는 그 확신은, 사실 내 자존감이 얼마나 타인의 시선과 외적인 조건에만 기생하고 있었는지를 드러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다가 당연하게도 헤어졌다.
그리고 몇 달 후,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J가 죽었대. 오토바이 사고래.”
그 죽음은 나의 사고체계를 전부 흔들어놨다. 나는 염치도 없이 그의 영정사진 앞에서 울었다. 누구보다 가까웠던 이의 죽음과 그에게 남겼던 나의 오만한 상처는 고스란히 나에게 찌르는 듯한 죄책감으로 다가왔고, 삶의 성취나 외모와 같은 본질에서 동떨어진 것들에 대한 크나큰 회의감이 몰려왔다. 나는 아마 꼬박 5년 정도 괴로워했던 것 같다. 그의 마지막을 망쳤다는 가해자로서의 죄책감도 물론 컸지만, 이후 삶에 없던 죽음이라는 선택지가 생겨버린 것이었다. 죽음의 이미지는 일상에 선명하게 드리워졌다. 이후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죽어버릴까 봐, 내가 사랑하는 강아지들이 죽어버릴까 봐 매일 밤 잠들기 어려웠다. 상담센터를 다니면서 불안을 잠재우려 했지만 무료상담센터는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후, 나는 괄목할만한 성취를 만들어내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이른바 ‘낮은 수준에서 다재다능한 부류‘였다. 그림, 노래, 공부 많은 영역에서 프로의 경지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아마추어의 세계에서는 제법 괜찮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나를 긍정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런 ‘이유 있는 긍정‘은 근원적인 존재론적 물음 앞에서 얼마나 유약하게 스러지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렇게 내 오만은 맥을 못 추고 죄악감과 자기혐오로 형태를 바꾸었다. 그리고 나는 쇼펜하우어의 신봉자가 되었다. 삶은 진실로 고통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때, 내가 무엇을 했는지 뒤늦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에게 남겼던 감정에 대해서는, 이전에 썼던 글에 더 솔직하게 남겨두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근거 위에 세운 자존감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를.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전 글에서 더 자세히 다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