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삼월, 꽃이 져도 봄은 오지 않는다

무의미한 우리의 생로병사

by 메리

춘삼월은 그리 따뜻하지 않다. 아직 겨울옷을 들여놓기엔 이르고, 벌거벗은 겨울나무의 가지에는 잎새가 돋아날 기미조차 없다. 진정한 봄은 벚꽃이 다 떨어지고 나서야 찾아온다. 갑작스레 따뜻해진 날씨에 얇은 옷을 꺼내 입었다가도, 축축하게 내리는 봄비로 다시금 서늘해지는 대기에 이내 두툼한 외투를 다시 꺼내 드는 것, 그것이 춘삼월의 인색한 봄기운이다. 모든 계절과 보이지 않는 존재들은 이처럼 기척 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다 어디선가 슬그머니 꽃봉오리를 틔우고는, 저 혼자 피었다가 저 혼자 져버린다.


낙화하는 벚꽃 잎을 보며 눈가를 적시던 때가 있었다. 20대 초반의 여린 감수성이었겠지만, 그때는 알지 못했다. 지는 꽃이야말로 진정한 봄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생명력의 사그라듦이 있어야 또 다른 생명이 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나무 한 그루와 만물은 몸소 보여주고 있다.


우리 할머니는 춘삼월이 오기 전 눈을 감으셨다. 할머니의 낙화는 그렇게 고요하게 봄을 깨웠다. 울부짖는 통곡이나 갑작스러운 충격보다는, 예견된 자연현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나와 함께 일하는 분은 시아버님을 모시며 '나도 빨리 죽어야지'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신다. 제 의지로 태어난 삶이 아닐지라도, 진심으로 죽음을 바라는 이가 어디 있으랴. 흐릿해진 정신과 쇠약해진 몸이 주변에 폐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그리고 나 역시 그런 노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결코 기쁜 일이 아니다. "살아서 뭐 하나, 빨리 죽어야지"라며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면서도 생을 쉽게 놓지 못하는 마음. 저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으면서도 내 곁에 조금만 더 머물러 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양가감정. 인간은 그 모든 감정 사이에서 서성이다 고요히 죽는다.


노인의 죽음에는 특별한 까닭이 없다. 우리 동네는 단독주택이 밀집해 아파트 단지보다 젊은 기운이 적고, 아이들의 생기보다는 노인들의 적막함이 감도는 곳이다. 집 앞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빨간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왜 하필 우리 집 앞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해가 비치면 해를 맞고 눈비가 오면 그대로 맞으며 앉아 계셨다. 어느 추운 겨울날, 여전히 우리 집 앞에 앉아계신 그분을 보며 핫팩 하나를 가져다 드릴까 고민했다. 하지만 괜히 말을 걸었다가 서로 부담스러워질까 머뭇거리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며칠 후, 집 주변에 큰 경찰차와 경찰들이 서 있었다. 그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그때 나는 깊이 후회했다. 핫팩 하나 건네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다고 머뭇거렸을까. 핫팩 하나가 노인의 죽음을 막지는 못했겠지만, 적어도 생의 마지막에 따뜻한 기억 하나는 남겨드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부채감이 여전히 나에게 남아있다.


우리 집 앞에는 어린이집이 하나 있다. 노인들의 부고 소식만 들려오는 고요한 동네에서, 이 아이들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가늠조차 어렵다. 출산율이 낮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뉴스가 아니더라도 일상의 모든 풍경에서 실감한다. 그 어린이집 앞에서 노인들의 죽음은 의미를 잃는다. 연유 없는 죽음에 슬퍼하며 나는 기어이 죽음에서 의미를 찾으려 애쓰고 있다. 이 대지에 또 다른 생명이 깃들 거처를 마련해 주기 위해, 꺼져가는 생명력을 마냥 슬퍼하지만은 않아도 될 이유 말이다. 우리의 생로병사가 의미를 가지려면 새 생명의 탄생이라는 전제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지구라는 땅이 척박하다는 소문 때문인지, 새 생명들은 좀처럼 들어서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노인의 죽음은 더 이상 새 생명을 위한 양보도, 인류 존속을 위한 명예로운 사라짐도 아니게 되었다. 낙화하는 꽃잎 뒤에 우거질 녹음을 기대하기 어려운 시대다. 이제 꽃이 져도 봄은 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