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문턱에서 발견한 생의 복원력
2023년 11월 말.
신경안정제를 입안에 털어 넣으려 했던 그날로부터 사흘이 지난 뒤의 기록이다. 죽음에 임박했던, 너덜너덜해진 나의 영혼이 담긴 일기장을 이제야 펼쳐본다.
이토록 비관적인 글을 굳이 꺼내어 놓는 이유는 간단하다. 나의 개별적인 괴로움이 어쩌면 보편적인 고통을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수많은 이들이 나와 비슷한 터널을 지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죽음’이라는 선택지는 결코 나약함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살기 위한 수많은 발버둥 끝에, 결국 답을 찾지 못한 막다른 길에서 마주한 마지막 선택지였을 뿐이다. 우리의 고통은 나약해서 생긴 것이 아니다. 그저 소모되었고, 지독하게 지쳤을 뿐이다. 기분 전환을 한다고 해서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는, 그런 가벼운 종류의 아픔이 아니었을 뿐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니 함께 죽자는 권유가 아니다. 그러니 이 일기의 말미에서 잠시 멈춰주길 바란다. ‘죽음’ 이외의 출구를 찾으려 했던 나의 처절한 분투를 봐주길 바란다.
생존을 위해 어머니의 젖을 빨다 입술의 핏줄이 터지던 신생아처럼, 남아있는 모든 에너지를 생의 복원에 쏟아붓고자 했던 그 작은 의지. 그 처절한 의지가 곧 생의 회복을 위한 근원이자 씨앗이었을지도 모른다.
너무 힘든 날이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도 않았고, 가만히 있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했다. 세수도 겨우 했다. 화장실까지 들어가서도 끝내 샤워를 하지 못한 채 방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살다가는 말라죽은 화초처럼 내 생명력이 영영 시들어버릴 것만 같았다. 살아가고 행동할 최소한의 동력이라도 얻고 싶었다.
그래서 이 집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버렸다. 우환의 집. 눈을 돌리면 걱정거리밖에 없는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별안간 30일간의 여행 정보를 찾기 시작했지만, 고민은 깊었다. 이것은 결코 기분 전환을 위한 여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삶의 전환을 위한 절박한 시도이니, 큰돈을 들여 다녀와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엄습했다. 가끔 호텔 방으로 피신하던 것처럼 책임과 걱정 없는 곳으로 숨고 싶었지만, 호텔을 매일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여기서 가만히 누워 있다가 그대로 말라죽어야 하는 것일까.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아 전화 심리 상담을 신청했다. 상담료는 5만 8천 원. 전문가의 대답을 갈구했으나, 1회성 상담은 평생을 고민해 온 나보다 더 깊은 답을 내어주지 못했다. 그저 내 생각을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었기에, 그 돈은 값어치조차 없었다. 결국 큰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는 내가 힘든 것을 온전히 알아주었고, 그 고마움에 나는 울고 또 울었다. 15년 먼저 태어난 언니는 결코 나이를 헛먹지 않았다. 나는 내가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워 꺼이꺼이 울음을 토해냈다.
울다 보니 과거의 가련한 나에 대한 '애도'가 필요하다는 말이 떠올랐다. 지난 몇 년간 나는 답을 찾으려고 처절하게 고군분투했었다. 왜 내 인생은 이토록 꼬이고 있는 걸까. 약 5~6년간 나는 너무나 힘들었다. 물론 그전에도 고단했지만 최근 몇 년은 특히 가혹했다. 뇌가 망가지지 않으려야 망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 시간들이었다. 버텨준 내가 대견하기보다, 그저 그 몰골이 불쌍해 견딜 수가 없었다.
금쪽상담소에 나오는 연예인들도 힘들어 보이지만, 적어도 내 주위에서는 내가 제일 고통스럽고 가련했다. 예전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어느샌가 그렇게 되어버렸다. 자기 연민은 독이라 하지만, 내 삶을 직접 살아본다면 누구라도 나를 연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름대로 노력하며 살아왔음에도 인생의 난이도는 점점 높아졌고, 결국 몸조차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졌다.
자신을 죽이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철학적 질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목적은 무엇인가. 그 끝에서 얻은 답은 역시 '목적이란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목적 없이 그저 순환하는 유기체일 뿐이다. 그렇게 태어나고 저무는 것이다. 종내에는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할 미물이며, 결국 먼지보다 작아질 존재들.
어제는 삶을 조금이라도 지속해 보려는 발버둥으로 '마음 근력 강화'에 관한 영상을 보았다. 하지만 죽음을 택하려는 자에게 그런 말들은 통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롱처럼 느껴졌다. 죽음을 갈망하는 이에게는 마음 근력을 강화할 의지도, 기력도 남아있지 않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은 마음 근력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당위성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본질과는 동떨어진 껍데기 이론들이 세상을 판치고 있다.
7전 8기를 외치며 성공을 강의하던 행복 전도사는 만성 통증으로 인한 우울증 끝에 자살을 택했고, 열성적으로 영향력을 전파하던 이는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으로 젊은 치매를 얻었다. 누군가에게는 견딜 수 있는 스트레스가, 다른 이에게는 차라리 죽고 싶은 고통이 되기도 한다.
지속되는 신체적 통증은 미래를 보는 시야를 암담하게 가리고, 누적된 심리적 고통은 작은 자극에도 인간을 취약하게 만든다. 죽음을 결심할 만큼의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이들은 "그래도 힘내서 살아야지"라고 쉽게 말하지만, 계속해서 괴로운데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과거와 같은 괴로움이 미래에도 반복될 게 뻔히 보이고, 하루하루 숨 쉬는 것조차 민폐이자 고통인데 왜 살아가야 하는가.
자살하려는 사람에게는 저마다 정당한 이유가 있다. 삶을 포기하는 데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며, 죽음에 대한 본능적 공포를 압도하는 지옥 같은 괴로움이 전제되어야 한다. 인생이란 살지 않을 이유는 백만 가지지만, 살 이유는 좀처럼 찾기 힘든 것이다.
기분 좋은 경험에 취해 있을 때는 굳이 인생의 목적을 묻지 않는다. 그저 존재 자체를 즐기고, 여행을 꿈꾸며, 나누는 대화에서 행복을 느낀다. 죽지 못해 겨우 숨만 붙이고 사는 이들은 이 담론에서 배제된 채 살아간다.
그럼에도 그들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끝내 삶을 선택했다면, 그때부터는 인생을 전혀 다르게 보게 된다. 일기 쓰기 싫어서 한 줄만 쓰려던 것이, 걷잡을 수 없이 길어졌다. 이제 나는 정신과 의사조차 온전히 믿지 않는다. 다만 말뿐인 강연자들보다 나은 점은, 그들은 약을 처방한 후의 차도만 살피는 객관적인 태도를 견지하기 때문이다.
지난 10여 년의 인생은 엉망진창이었다. 뇌가 멀쩡하다면 그것이 더 비정상일 정도로 영혼은 너덜너덜해졌다. 스스로 망가져 가는 모습을 관전하며, 내 생명력이 다해감을 상기할수록 안타까움에 눈물이 흐른다.
나는 그저 아팠을 뿐이다. 아팠기에 판단력이 부족했을 뿐인데,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해주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내 문제를 발견했다. 문제를 인지했다면 해결을 시도해 볼 수 있고, 변화를 기대할 수도 있다. 나의 인생은, 이제 조금씩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잘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