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동거자 파썸, 혹은 오파썸
우리 집에는 개인 산책로가 있다. 정확한 길이를 재본 적은 없지만 아마 가장 짧게 오백 미터 내지 칠백 미터가량 될 것이다.
처음부터 산책로가 있었던 건 아니다. 처음 우리가 이사 왔을 때, 잔디밭과 집이 위치한 3 에이커를 빼면 나머지 8 에이커는 완전한 황폐지였다. 버지니아 피드먼트(Piedmont. 문자 그대로 해안가보다 조금 높지만 산간지방은 아닌 곳을 뜻한다) 지역에서 외래침입종으로 분류되는 모든 식물들이 그 8 에이커를 아주 빽빽 채우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버지니아에서도 최근 개발을 마친 곳에서 아주 흔히 볼 수 있다. 한 번 들쑤신 자리에는 가죽나무 Ailanthus altissima, 보리수나무 Elaeagnus umbellata, 그리고 콩배나무 Pyrus calleryana 'Bradford'가 먼저 와서 자리 잡는다. 남은 자리는 찔레 Rosa multiflora, 중국쥐똥나무 Ligustrum sinense, 비수리 Ledespeza cuneata, 바늘비름새 Microstegium vimineum 등이 발 디딜 틈도 없이 자라난다.
북미 동해안 특히 버지니아의 날씨는 한국과 상당히 비슷하다. 엄밀히 말하면 겨울에 덜 춥고, 여름에 더 뜨겁다. 대신 겨울에 덜 건조하고 여름에 더 건조하다. 여러 경위와 이유로 북미에 들어온 이 동아시아의 식물들은 원산지보다 '온화한' 버지니아에서 대단한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다.
우리 집 뒤 '관리형 보전지(conservancy lot)'는 20년 이상 수많은 외래침입종 식물들의 모든 표본을 산 채로 완벽히 보전했다. 외래침입종을 좋아하는 꽃매미와 진드기도 각각 가죽나무와 당매자나무 덤불에서 먹고 싸고 번식하며 평온한 삶을 살았다.
이 집에 이사 온 두 노인네가 마침내 그 평화를 깨뜨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가죽나무와 보리수나무부터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따라 산책로를 냈다. 더디지만 확실하게.
우리는 우리가 그 땅의 프런티어인 줄 알았다. 인간은 라임병 무서워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 빽빽한 수풀에 드나들던 포유류라고는, 늘씬한 몸매에 백치미 넘치는 얼굴을 하고 여기저기 진드기를 퍼뜨리고 다니는 사슴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해가 길던 여름날 저녁 - 버지니아에서는 일광절약시간을 쓰기 때문에 여름해가 몹시 길게 느껴진다 - 산책로 입구에 있는 퇴비더미에 정원에서 거둔 쓰레기를 버리고 오는데, 어둑해지기 시작한 산책로 옆 나무 아래 무언가 고양이만 한 동물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내가 걸음을 멈추자 그 짐승은 얼른 뒤를 돌아보더니 쏜살처럼 도망갔다.
파썸이었다.
북미에서 유일한 유대류. 굳이 번역해서 북미주머니쥐라 부르는 그 파썸. 원래 오파썸인데 사람들이 별 이유 없이 파썸이라 부르기 시작한 그 파썸.
나는 휠버로를 밀고 신나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남편에게 말했다.
"나 파썸 봤어! 우리 집에 파썸 있어!"
못생긴 파썸이 뭐가 그리 좋냐고 묻는 남편에게 나는 파썸이 어떻게 북미 생태계를 떠받치고 있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파썸은 진드기, 민달팽이, 독사 같은 해충과 해수를 잡아먹고, 얼굴 귀여운 라쿤과 달리 광견병도 옮기지 않으며, 숲 속에서 죽어 부패하기 시작한 온갖 쓰레기를 다 먹어 치우는 자연의 청소부라고.
파썸에게는 스튜어트라는 이름이 붙었다. 빅뱅씨오리에서 만화책가게를 하는 등장인물 스튜어트의 별명이 파썸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그가 여자친구와 함께 식사하는 모습이 퇴비더미 부근에서 발견됐다. 나는 그의 여자친구에게 스테파니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빅뱅씨오리에 의하면 그 이름은 '데니스'여야 한다. 하지만 기억력 나쁜 이 노부부가 일상대화에서 그 데니스라는 이름을 얼른얼른 떠올리지 못할 게 분명하다.
스튜어트의 풀네임은 스튜어트 디델피스 버지니아나 Stewart Didelphis Virginiana다. 우리 집에 오는 동물들은 모두 그런 식의 정식 풀 네임을 갖고 있다.
새순이라면 닥치고 다 먹어치우는 망할 사슴 년 말고는.
2026. 1. 18.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