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앓이
아이가 나에게 오는 기적은 감당할 수 없는 몸의 변화와 무기력을 동반해서 찾아왔다. 시집을 소리 내어 읽고 고전 필사도 열심히 했다. 모차르트를 듣고 나의 청춘에 함께 한 언니·오빠 노래에 어깨도 들썩여보고, 트로트에도 흥얼흥얼 춤을 추었다. 세상엔 편견이 없어야 하니까. 하지만 자신만만한 호기로움은 세상 처음 겪는 입덧과 끝없이 처지는 나른함에 태교는 겸손함으로 바뀌었다.
열 달 동안, 시계 톱니의 시스템처럼 태교와 아이 중심의 일상은 FM처럼 굴러갈 줄 알았다. 가장 난감한 건 세상에, 내 몸을 내가 제어할 수 없다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뱃속에서 아이가 배아에서 태아로의 성장통을 알아달라고 신호를 보내는 중이라는데, 뭐라 할 건가. 아이가 나도 고된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고 하는데.
오매불망 기다리던 행복의 순간이라 걸음걸음이 조심스러웠고, 커피를 밀어두고 허브차를 곁에 두었다. 뱃속에서 뭘 하는지 태동이 뜸할 땐 제발 엄마 걱정하지 않게 발길질 한 번만 해 달라고 불룩해진 배를 톡톡 두들겼다. 신기하게 엄마 마음을 알았는지 잘 있다고 발을 쭉 내밀었다. 그러면 또 세상 행복한 엄마가 되었다. 딸아이는 마흔 해의 선물이었다.
무슨 바람이었을까. 꽃샘바람이 심장으로 불어와 이상한 마음을 갖게 했을까. 꽃샘바람이 불던 날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고, 마흔일곱 네 계절 동안 둘째를 만나기 위해 노력했다. 딱 1년 만이라는 기약을 두고. 드디어 아주 작은 세포로, 둘째의 빅뱅을 보았다. 꼭 1년 후에 마흔여덟 해의 선물로 아이는 나에게, 우리에게 왔다.
어느 날, 작은 표식처럼 아들내미의 아래쪽 잇몸에 두 개의 이가 올라오고 있었다. 크게 칭얼대고 보채지 않아 몰랐다. 타고난 성격인지 웬만한 아픔은 별거 아니라는 건지, 쉰을 바라보는 엄마를 배려한 건지. 이앓이를 시작으로 아이에게 통과의례는 나이에 맞추어 찾아올 것이다. 배변 훈련을 해야 할 테고, 밥도 혼자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할 것이다. 또래와 어울리기 위해선 양보와 배려할 줄 알아야 할 테고, 잘못하고 혼나면 눈물도 뚝뚝 흘리겠지. 대신해 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니 응원하고 격려할 뿐 부모의 개입은 선 밖이다.
딸의 사춘기 준비는 나 또한 겪은 과정이라 미리 알려주고, 혹여나 당황하지 말고 엄마에게 꼭 말하라고 신신당부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날 찾아올 아이의 첫사랑에는 모른 척을 해야 할까,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리며 먼 산 바라보는 척을 할까, 도리어 노파심에 일거수일투족 관심을 위장한 훈수를 두어야 할까. 조바심은 점점 커진다. 10년 후쯤 아들의 통과의례는 어떻게 도와야 하나. 아빠에게 일임해야 할까. 또 발을 동동 구른다. 오지도 않은 시간에 조급하게 굴지 말자. 라마즈 호흡. 후후 후후후.
아이들이 하나씩 통과의례를 치를 때마다 나의 시간은 생의 소실점을 향해 가고 있을 텐데. 행여나 아이들이 홀로서기 하기도 전에 이별이 찾아올까 가슴이 미어지는 밤도 있다. 또 쓸데없는 고민으로 나를 다그친다. 지금 더 많이 사랑하면 되는 거지. 극성 엄마가 되기에 저질 체력은 신의 한 수다. 독서 모임에서 시작한 글쓰기 주제 ‘유서 쓰기’에 너무 몰입했나 보다. 어느 날엔가 준비를 시작해야겠지. 지금은 많이 웃고 이야기 들어주어야지. 심장아, 튼튼해져라. 수리수리 마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