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렵지만 부딪쳐야 할 사회
한 손에는 노트북 가방과 어린이집 가방을 들고 다른 한 손은 신발과 각종 서류, 그리고 잠든 아이. 택시를 타고 두 번의 번호표 뽑기와 수납을 마치고 나니 두 팔이 떨어져 나갈 듯 아팠다. 하지만 정신은 더 강해지는 느낌이다.
서울대 어린이병원 응급센터에 오면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질 때가 있다. 일반병원에서 볼 수 없는 교통사고 중증 환자, 작은 몸에 꽂은 수십 개의 주삿바늘, 장애로 얼굴이나 몸이 일그러진 아이. 저 아이의 부모는 어떤 기분으로 살까, 내 아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며 안도하는 한편 이런 마음을 갖는 건 그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내 아이도 예측 불가능한 사고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
부모가 되면 안다. 내 아이가 아무리 무서운 장애를 가지고 다른 사람 눈에는 사랑스럽지 않아도 부모에게 소중함과 책임감은 결코 부족할 수 없는 것을. 내 품에 안겨 잠든 이 아이가 나를 너무 힘들게 해도 지킬 수 있다면 나는 무슨 일도 할 각오가 든다. 아이에게 부모는 세상의 전부고 우주 같은 존재다.
서울대병원은 일반병원의 진료의뢰서가 있어야 갈 수 있는 3차 의료기관이다. 작은 감기로 갔다가 의사에게 동네 병원에 가라는 핀잔을 들을 수도 있고 중증 어린이 환자들 앞에 숙연해지는 곳이다. 이런 무서운 서울대병원을 여러 번 간 것은 대부분 내 잘못 때문이다. 한 번은 아이 손이 엘리베이터 문에 끼어 골절이 의심되는 상태였고 다른 한 번은 머리를 바닥에 세게 부딪쳐 뇌진탕 증상을 보여서다. 평소 다니던 큰 병원도 정밀촬영이 힘들다면서 서울대병원을 추천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행히 아이에게 문제가 없다는 확진을 받고는 참았던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이에게도 남편에게도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남편에게서 돌아온 건 “어떻게 한눈을 팔면 아이가 이 정도로 방치되느냐.”는 차가운 말이었다. 우리의 연애·결혼 시간을 통틀어 처음으로 남편에게 욕을 한 사건이다.
만약 아이를 돌보던 게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남편이나 부모님, 베이비시터, 어린이집 선생님이라면. 어땠을까.
아이를 돌본다는 건 그렇다. 모든 것이 완벽해도 작은 실수 하나로 용서받기 힘든 죄인이 될 수 있다. 그 아이가 내 자식이 아니라 남의 자식일 때는 부모 가슴보다 몇 배 더 상처 받고 무거운 책임감을 피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부모는 아이를 남에게 맡기면서 나보다 더 잘 봐주기를 바라고 잘못되면 원망하는 이기심을 갖는다.
율이가 100일도 안돼 손톱 밑의 살이 잘려나간 것을 뒤늦게 알았을 때, 어린이집 하원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갔는데 담임교사가 솔이 우는 것을 못 본 체하고 청소기를 돌릴 때 그랬다.
나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이는 누가 봐도 다칠 수 있고 나도 집안일이나 재택근무를 하면서는 우는 아이를 내팽개쳤다. 그리고 아이를 맡기는 게 그렇게 불안하면 일을 그만두고 직접 보라는 말을 들을까 봐 무서웠다.
생후 2개월의 율이를 베이비시터에게 맡기고 복직한다고 밝혔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는 싸늘한 반응만 돌아왔다. “요즘 엄마들은 중요한 것을 모른다.”, “엄마 맞냐.” 등등 가슴을 콕콕 찌르는 가시 돋친 말들뿐이었다.
이런 선입견은 엄마인 나의 몫이기에 참을 수 있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아이가 커 가면서다. 만약의 사고가 발생했을 때를 대비하는 방법은 CCTV뿐이다. 말과 의사표현이 완벽하지 않은 아이에게 사고 정황을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건 보조 양육자가 아닌 CCTV에 의한 증거기 때문이다.
“아이를 맡아준 베이비시터와 어린이집 선생님은 우리 가족 모두의 은인이다. 부모를 대신해 아이를 봐준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대단한 일이냐. 그 은혜는 살면서 절대로 잊어선 안된다.”
친정아빠의 문자 한 통. 이 말을 기억하며 나는 매일매일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거대한 산을 마주하는 기분이 들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이들을 선생님 손에 인계하거나 받으면서 하는 늘 똑같은 인사에 간절한 진심을 담아 전달되기를 기도한다. 오늘도 다치지 않게 해주세요.
혹시나 내 과실이 아이에게 피해를 줄까 봐, 가정교육 잘못받는 아이라는 편견이 씌워져 천덕꾸러기 신세가 될까 봐 노심초사하며 엄마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우는 것을 강제로 떠맡기며 돌아설 때는 선생님이 가까스로 잡는 지푸라기 같은 존재다.
세상에 아이를 자기 손으로 키우고 싶지 않은 부모가 있을까. 하지만 아이는 부모품을 떠나 사회로 나가기 마련이다. 그 시기가 남들보다 조금 앞당겨졌을 뿐. 사회가 일하는 엄마를 ‘매정한 엄마’로 내몰지 않으면 좋겠다.
눈앞에 두고도 기침소리가 걱정돼 밤새 가슴 졸이는 게 부모지만 아이는 밖의 사회를 통해 몸도 마음도 쑥쑥 자란다. 어린이집 생활은 아이에게 행복한 경험과 용기도 심어준다. 화재·지진 대피훈련이나 성폭력 예방교육 등은 사회가 부모를 대신해 제공해줄 수 있는 경험이다.
아이의 첫 사회생활을 지지하는 마음,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복잡하지만 아이는 어른들의 생각보다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