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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레어 Apr 10. 2023

솥밥을 짓는 마음


백미 한 컵과 현미 한 컵을 볼에 넣고 말갛게 씻어내 체에 받쳐 불린다. 그 옆에선 손바닥보다 작은 다시마 몇 조각과 멸치, 마른 새우를 넣어 육수를 낸다. 데친 문어는 먹기 좋은 크기로 썰되 대충 듬성듬성 썰지 않는다. 이 또한 너비를 맞춰 예쁘고 가지런하게 썰어낸다. 이토록 부산스러운 이유는 반가운 손님이 집에 오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사는 오랜 친구가 결혼식을 위해 귀국 했다가 다음 주면 다시 돌아간다. 그래서 친구에게 따뜻한 집밥 한 끼를 대접하려 한다.



서로의 치부와 흑역사를 싸이월드 급으로 보관하고 있는 우리. 우리는 학교 앞에서 핵폭탄 맛 닭꼬치를 사 먹던 여고생이었다는 사실을, 해가 진 어두컴컴한 야자시간에 이어폰을 나눠 꽂고 라디오를 듣던 여고생이었다는 사실을, 소풍 가기 전날 동대문에 가서 몇 시간씩 멋부림용 옷을 고르며 들떴던 여고생이었다는 사실을 만나서야만 비로소 추억할 수 있는 마음 바쁜 어른이 되었다. 딱 한박자, 뜨거운 밥 한술 나누어먹으며 쉬어갈 오늘을 위해 부산스럽지만 기쁜 마음으로 주방을 휘젓는다.



불린 쌀을 무쇠 냄비에 붓고 그 위에 문어를 가지런히 올린다. 쌀과 같은 양의 육수를 조심스레 부어주고 불을 강하게 올린다. 밥이 끓으면 불을 중간으로 줄여 계속 끓인다. 동시에 쪽파를 송송 썰어낸다. 평소와는 다르게 크기를 맞춰 최대한 예쁘게. 친구가 도착하면 늘 그래왔듯 서로를 놀리고 또 놀릴 것이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예쁜 친구의 외모를 인정하지 않고 예전이 더 나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짓는 이밥에 나의 마음을 온전히 담아내야 한다. 사실 나는 너를 정말 좋아하고 아끼고 사랑한다는 마음 말이다. 만나선 쑥스러워서 하지 못할 이 말, 놀리고 쓸데없는 농담을 하느라 건넬 틈이 없을 진심의 말들을 이 솥밥 한 그릇에 담아내려 애쓴다.




솥밥은 잘 불린 쌀과 육수의 양이 정확히 들어맞아야 한다. 강불과 중불, 약불을 모두 사용하여야 하며 꽤 예민한 불 조절을 필요로한다. 휘리릭 씻어내어 버튼만 누르면 밥이 되는 세상이지만 오늘만큼은 수고로움을 즐긴다. 소중한 친구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수고를 들여 따뜻한 밥 한공기를 내어주고 싶다. 누구보다 예쁘고 마음도 고운 내 친구야, 오늘의 밥 한끼가 우리의 앞으로의 시간을 채워주는 또 다른 추억이 되었으면 좋겠다. 영국에 가서도 연락 자주 해. 보고 싶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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