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번호 깨진 가정
2019년 가을, 낯선 번호에서 온 문자 한 통
그날의 진동과 함께 울린 휴대폰.
퇴근하려고 매장에서 마감 중이던 나는
화면에 뜬 모르는 번호를 멍하니 바라봤다.
“00 주임님 연락이 안 돼서요.
해외 나가신 걸로 나오는데,
누구랑 간지 아세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익숙하지 않은 번호.
낯선, 그러나 묘하게 불편한 말투....
이게 무슨 말이지?
그는 회사 출장이라고 했다.
4박 5일, 홍콩이라고 했다.
출국 전날까지 아들에게
출장 다녀와서 놀러 가자고 하던 그였다
“아빠 금방 다녀올게 선물 사 올게”라고 말했었다.
그런데 왜,
회사에서 아내인 나에게 이런 걸 묻는 걸까.
이건, 뭔가가 맞지 않았다.
의아한 마음에 손끝이 차가워졌다.
문자를 보낸 그 번호로 전화를 걸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출장으로 홍콩 간 걸로 아는데..”
잠시의 정적 뒤,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저, 회사 동료인데..."
그리고 나는, 그 사람이 누군지 바로 알았다.
무슨 일만 있으면 야근을 하고,
쉬는 날에도 업무 핑계를 대며 함께 있었다던 그 여자.
남편의 입에서 무심히 흘러나오던 ‘선임’이라는 이름.
여자는 오감이 아니라 육감으로 산다고 하지 않던가.
그 순간, 내 몸속 깊은 곳에서 뭔가가 ‘딱’ 하고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육감은 소름 끼치도록 정확했다.
그녀는 내가 늘 아이 아빠와의 관계에 물음표를 붙이게 만들던 존재였다.
그런 여자가, 왜 나에게 “누구랑 여행 갔냐”라고 묻는 걸까?
그녀의 속내는 곧 드러났다.
분노로 가득한 목소리로 그녀는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말을 했다.
“저… 사실 6년간 그 사람이랑 그런 관계였어요.
근데 지금은 다른 여자랑 여행 간 것 같아요.
저, 그 여자 잡아주세요.”
순간, 귀가 멍해졌다.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그녀의 말속에는 기막힌 모순이 있었다.
자신이 유부남과 바람을 피운 걸 인정하면서도,
또 다른 여자에게 뺏긴 걸 분해하고 있었다.
옛말에 첩질 하는 여자가 첩질 못 본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자기가 못 가지니 다 엉망진창이 되었으면 한다는
그녀 참 어리석고 멍청하면서도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한건 사랑일까? 아니면 욕구충족이었을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바람을 피우고 있을 거라는 걸.
다만, 손에 쥘 ‘증거’가 없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묵인하며 버텼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될 때까지.
그녀는 심지어 말했다.
“유부남인지 알았어요.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만났어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결국, 내가 믿고 있던 ‘가정’이란 건 처음부터
허상에 불과했던 셈이었다.
그의 민낯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본 순간이었다.
집요하고, 비겁하고, 자기 욕망에만 충실한 사람.
참...
지나고 보니, 한심하다.
왜 그 구정물 싸움에 내가 끼어, 구정물까지 온몸에 뒤집어써야 했을까.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이 이토록 깊고 지독한 상처를 남길 줄,
그땐 정말 몰랐다.
그럼에도 나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아이 아빠라는 이유로 그를 용서해보려고도 했다.
아니, 최소한 ‘용서하는 척’이라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말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본인의 잘못을 반성하기보다는
이 핑계 저 핑계로 빠져나가려고 하기 바빴다.
나의 긴 연애 어정쩡한 기간의 결혼 생활은
그렇게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