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질러진 시간, 그리고 그날의 나에게
엎질러진 시간, 그리고 그날의 나에게
매일 되물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는 약속을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왜 미처 몰랐을까.
왜 그런 사람을 믿었고,
왜 내 소중한 시간을 모두 그에게 내어주었을까.
내가 생각한 연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그를
왜 난 선택하고 내 인생의 가장 예쁜 시간들을
다 내어주었던 걸까?
사소한 약속도 쉽게 넘기던 그와
나는 왜 그렇게 오래 만났을까.
왜 나는, 왜 나는...
그때의 난 수십 번 되물었다
만약 지금, 다시 20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분명 스물셋의 나로 돌아가
그가 내게 사귀자고 했던 그날,
거절의 의미로
조용히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열심히 살아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항상 그랬다.
나와 같은 곳을 보는 게 아니라
우린 등 돌려서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결혼하면 2년 안에 내려와 주말부부는 하지 않겠다던 사람.
그러나 그는 결국
나와의 신혼이라는 시간을 단 하루도 보내지 않았다.
우리는
‘아들’이라는 이름의 고리로
끊기기 직전의 동아줄처럼 겨우 이어져 있었다.
끊어지기 직전의 동아줄 조금만 당기면 톡"끊어질 것 같은 위태위태한 줄 다리기를 우린 하고 있었다
아들이라는 연결고리
그 고리 하나로 6년을 버텼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남들에게 '잘 사는 부부'처럼 보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월례행사처럼
잠깐 들렀다 떠나는 그가
점점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지만
나는 아들에게만큼은 다정한 아빠로 남아주길 바랐다. 나에게는 사소한 모든 약속을 다 안 지켜도 아들에게는 멋진 아빠이길 바랐다
그건, 내 욕심이었다.
그는 우리에게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니, 마음이 이미 다른 곳에 있는 사람 같았다.
아들이 네 살 무렵,
수영장에 함께 가기로 약속한 날이 있었다.
나는 설마 그걸 어기진 않겠지 싶었는데,
약속 당일 그는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피곤해서 잤단다...
너무 섭섭해 그의 어머니에게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한다 어떻게 아들이랑 약속도 안 지키냐고 진짜 반품해버리고 싶다고 말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은...
일한다고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란다.
나는? 나도 일. 육아. 일. 육아 계속 챗바퀴처럼 돌아가는데...
난 노는가?? 그만 일하는가?
정말 해도 해도 너무했다
그가 그렇게 무책임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것도
어찌 보면 그의 어머니의 영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아닌 걸 알면서도 난 버텼다
나는 그가 ‘아들의 아빠’이기에
끝까지 ‘부모’라는 이름으로 함께하려 애썼다. 아니 버틸 때까지 버틴 거다.
그러나 그는 생각이 달랐던 것 같다.
한 달 넘게 전화 한 통 없었고
내가 남긴 부재중 전화에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본인볼일 볼 겸 잠깐 집에 들렀다 가는 우린 서류상 부부이고 남들한테 보이기만 신경 쓰는 그저 그런 관계였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제는 그를 단지
‘아들의 아빠’로만 보기로 마음먹었다.
아무 기대도, 아무 감정도 없애기로.
나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늦은 밤에 퇴근했다.
쉬는 날이면 하루를 온전히 아들과 보내며
엄마이자 아빠로 살아갔다.
혼자서도 잘 키울 수 있다는 오기가 발동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하려고 악착같이 일하고 육아에 힘썼다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면
언젠가 그가 약속대로
이 지역으로 발령을 받아
우리가 진짜 가족처럼 살아갈 수 있으리란
헛된 희망을 품고.
나는 그렇게, 매일을 살아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