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2)-두려움을 다룰지, 두려움에 달릴지

내 안의 두려움을 다루는 법

by 메리힐데

내면의 소용돌이와 잡아먹을듯 덮쳐오는 파도를 지나보내고, 며칠간 써왔던 두려움에 대한 글을 드디어 마무리한다.


차를 운전하는 게, 왜 두려운가? 아마 사고를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사고를 당하는 것은 왜 두려운가? 아마 상처를 입을지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상처를 입으면 어떻게 되기에 두려운 것일까? 아마 통증으로 고통에 시달리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가다 보면, 모든 두려움이 궁극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즉 몸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물질로 이루어진 몸이 곧 우리이며,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은 이것이 전부라는 믿음 때문이다.


-데이비드 호킨스, <치유와 회복> 중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이 아니면 어쩌지?"라는 나의 걱정 속에는 그 길을 결정하기까지 하느님께서 내게 불어넣어주셨던 용기와 감사, 기쁨과 생명력은 온데간데 없었다. 걱정이 고개를 들자 의심이 꼬리를 물었고, 걱정이 시작된 그 순간 바로 믿음으로 그들을 덮어버리지 않은 나는, 이내 그것들에게 내 스스로를 내어 주었다. 걱정은 의심을 먹고 자라고 의심은 불안을 먹고 자란다. 그들은 서로에게 최고의 자양분이 되어 내면의 빛을 순식간에 덮어버린다. 마치 나에게 태초부터 '빛'이란 존재하지 않았던 것 마냥.


아직까지도 흔들리는 것을 거부하는 삶을 지향하고 있었나보다. 고통을 겪기를 거부하고 있었나보다. 하느님의 길이란 광야가 없고 꽃향기로 무성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었나보다. 그렇게 나는 '하느님'이라는 마약에 취해 현실을 잊고자 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내가 현실에 깨어 있기를 바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마음을 굳게 걸어잠그고 나를 취하게 할 마약을 찾고 있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마르 4, 40)


돌풍이 부는 호수에서 혼비백산하는 제자들은 예수님께 말한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하고 말씀하셨다.


돌풍이 잠잠해진 뒤에 예수님께서는 다시금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셨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폭풍이 평온해진 상황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성찰을 통해 스스로를 깨닫고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삶의 역경과 풍랑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채라는 예수님의 뜻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나에게는 돌풍이 불면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자연스럽게까지 느껴진다. 다만 예수님의 질문에서 나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는다. 돌풍이 불 때 모두가 당연히 두려움의 희생양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내가 두려운 이유는 돌풍이 불어서가 아니라, 나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 나는 신뢰와 불신 중에 불신을 택했다는 것.


두려움과 싸우는 것이 두려움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일까?

두려움과 싸워서 두려움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두려움은 싸우면 싸울수록 내 안에서 그 규모를 키운다.


두려움을 선택한 '나' 스스로를 보아야 내면의 두려움을 다룰 수 있다.

결국 두려움을 다루는 힘은 내 안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 우리가 두려움의 근원임을 깨닫고, 이 두려움을 세상이나 신에게 투사하는 짓을 그만두어야 한다.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다루려면,
내면의 두려움을 다룰 힘이 우리 안에 있음을 인정하고,
우리가 두려움의 근원임을 깨달으며,
이 두려움을 세상이나 신에게 투사하는 짓을 그만두어야 한다.
-데이비드 호킨스, <치유와 회복> 중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였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에 잠식당한 이유는, 예수님의 현존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물에 빠져 죽을까봐, 그것이 두려워 불안하였던 것이다. 나의 죽음이 두려워 예수님을 믿지 못한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가 하는 일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면 어떡하지?'에 대한 두려움, 이는 곧 내 영혼이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궁극에는 모든 불안의 끝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으며, 그 시작은 하느님의 현존을 믿지 못한 것에 있었다.


불안을 초래하는 악마는 예상치 못한 때에 찾아온다. 그리고 '악'의 모습으로 찾아오지 않는다. 언제나 누구보다도 따뜻한 모습으로 '선'과 '의'로 가장해 찾아온다. 하느님의 형상을 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내 안에 있는 불신을 키우는 것, 그것이 내가 이번에 시험에 들었던 '유혹'이었다.


마르코복음서에서 풍랑을 가라앉히신 예수님을 보면, 내가 살아가는 곳은 꽃길만이 있는 세상이 아닌 것을 다시금 새긴다. 내가 믿는 하느님은 풍파가 없는 곳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풍파 가운데서도 현존하시는 분이시라는 것. 나는 풍파가 없는 인생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을 만나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것.


울새가 참새에게 말했네. "난 정말 알고 싶어. 인간들은 왜 이렇게 불안해하면서 그토록 서두르면서 염려하지?"
참새가 울새에게 말했네. "친구야, 내 생각에 그들에겐 하늘에 계신 아빠가 없어서인 것 같아. 너와 나를 돌보아 주시는 그 아빠 말이야."

존 스토트; 송봉모, <예수-우리의 발걸음을 아빠 하느님께로> 중에서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
당신께서 저의 원수들 앞에서 저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
제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저의 술잔도 가득합니다.
저의 한평생 모든 날에 호의와 자애만이 저를 따르리니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다.

-시편 23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