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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이 이혜림 Jan 20. 2022

남편의 전업주부 생활  

살림의 가치를 되새길 수 있었던 시간 





남편의 3일 오프(휴무) 가 시작됐다.

허리에 손을 올리고 진지한 표정의 남편이 말했다.


여보! 3일간 집안일 아무것도 하지마!

넌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너 할 일 해!


두 번째 원고 마감일이 얼마 안 남아서

살림+집밥을 하면서

그 외 대부분의 시간을 책상에 앉아있는

내가 안쓰러운 남편이 내린 특단의 조치.


그렇게 전업주부 남편을 부리는 (?)

3일간의 일상이 시작됐다.




남편의 3일간의 휴무 시작 전날은 

내가 주방에 선 마지막 날이었다.


미역국을 끓이고 부추전을 해서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하고, 

남편은 야간 출근을 했다.





다음 날 아침.

그러니까 남편의 전업주부 첫날. 


남편은 퇴근길에 나 아침으로 챙겨 먹으라고

내가 좋아하는 빵을 사 왔다 :)


슈크림 빵을 뇸뇸 먹으며

상쾌한 아침 시작-





작업실에 틀어박혀 글을 쓰다가

남편이 점심 먹으라고 부르면

쪼르르 나가서

남편이 차려준 점심밥을 먹었다 :)


냉장고에 남아있던 양파 조각을 넣고

달달 볶아 달달하고 매콤한 파스타

+ 그리고 어머님이 주신 한 박스의 피자 ㅎㅎ

오븐에 구워 먹었다.




점심을 먹고 이제 청소를 하려고 하니

내게서 청소기를 뺏은 남편은

다부진 표정으로 말했다.


앉아 있어 앉아 있어!

쉬어! 아무것도 하지마!

그냥 앉아 있어!

내가 다 할게!


그래서 이번에는 청소기 돌리고

빨래 개는 남편 옆에 앉아서

나는 읽고 싶던 책을 원 없이 읽었다.





오후에는 함께 산책을 했다.

남편과 손 잡고 하는 산책이 얼마만인가

헤아려보니 마지막 산책이 기억나질 않는다.

우리 부부. 요즘 참 열심히 성실하게도 사는구나.


오랜만에 나선 산책길의

날은 맑고 달은 밝았다.

그만큼 추웠지만.





주전부리를 사 와서

우리만의 해피아워 타임 :)


요즘 남편과 보내는 시간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살 뺀다는 핑계로

근래 들어 나는 과자를 따로 안 사고

남편 과자 조금만 먹을게! 하는데

매번 내가 거의 다 먹는 것 같다 ㅎㅎ

그거 다 알면서도 늘 속아주는

착한 남편.





확실히 책 출간을 준비하며

마음이 붕 뜨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사실 나의 생활을 똑같다.


여전히 글을 쓰고, 글을 고치고, 글을 보낸다.

마냥 붕 떠서 내가 이룬 첫 책 출간!!!!! 이라는 꿈을

만끽하는 것은 아주 잠깐.

다시 작업실에 틀어박혀 글을 쓴다. 여전히. 똑같이.




매일 밤에 글 쓸 때는 보리차를 끓여 마시는 걸 아는 남편이, 말하지 않아도 척척 가져다준 보리차 :)


오늘 남편이 점심을 만들고 있을 때

내내 베베 꼬인 몸으로 책 작업을 하고 있다가

남편 옆에 가서 구시렁거렸다.


하기 싫어~~ 하기 싫어~ 글 쓰기 싫어~


남편은 웃는 얼굴로 아기 어르듯 다 들어주더니

그래, 마음껏 칭얼거려라!라고 말했다.


근데 그 순간.

나는 되려 내가 쓰고 있는 부정 단어가 크게 와닿았다.

내 뜻대로 맘대로 잘 안돼서 부침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글 쓰는 게 정말로 싫은 건 아니었다.


곧바로 태세 전환하고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재밌어~!


그리고 다시 작업실로 들어가 문을 닫고

책상 앞에 앉아서

정말로 재밌다는 마음을 담아 글을 썼다.





난 백수잖아!

백수인데 뭐 어때-!라고 말할 때마다

남편은 "네가 왜 백수야. 글을 쓰는데. 작가지."라고 말했다.


남편에게 직업이라는 것은

꼭 그걸로 돈을 벌어야지만

가질 수 있는 이름표가 아니었다.


집에서 살림하며 하고 싶은 글로 돈을 벌어보겠다고

혼자 끄적이던 순간마다

가장 힘이 되었던 건 책 한 권 출간한 적 없는

그리고 언제 출간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나를

늘 작가라고 불러준 남편이었다.


그냥 난 앞으로도 계속 쓸 것이다.

재밌게.






밤에 남편이 설거지해둔 모습을 보고

픽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씻은 그릇들 말려 놓는 위치와

행주 말려놓는 것 하나까지도

그 모든 것이 내가 주방 마무리할 때의 모습

그대로 똑같이 되어 있었다 :)


나의 규칙과 나의 루틴을

누구보다 진지하게 이해해주는 남편.

이런 사소하지만 결코 절대

사소한 게 아닌 모습을 볼 때마다

그냥, 난 늘 감동이다.






오늘은 고마워서 내가 아침 준비.

우리 남편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딸기인데

요즘 딸기값 너무 비싸서 사본 적 없다. ㅜㅜ


이번에 오아시스 마켓에서 딸기값 조금 내렸길래

냉큼 장 보면서 샀다!

아침에 만나는 이 싱그러움이 참 좋네.






점심은 남편이 만들어준 쭈꾸미볶음!

전업주부 남편과 이틀을 살아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너무 편했다.


누군가 나를 위해 살림을 해주고 밥을 차려주고

곁에서 알뜰히 챙겨준다는 게

얼마나 호사스러운 시간인지 새삼 알게 했다.


그러니까, 내가 그간 하고 있던 주부의 일이

얼마나 가족에게 가치로운 일인지

다시금 되새길 수 있었다.


의미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나를 언제나 이쁜이~ 라고 부르는

우리 어머님.


며느리가 책 썼다고

그게 너무 기쁘고 대견하다고

우리 엄마께 전화하셔서는


"내가 너무 기분이 좋고 기뻐서

이게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라고요

사돈어른이랑 이 기쁨을 나누고 싶어서

전화했지 뭐예요."라고 하셨다고.


우리 딸 시댁 하나는 정말 잘 만났다라고

말씀하시던 우리 엄마. ㅎㅎ


그러게. 지금 보니까 나는

시댁도 잘 만났고 남편도 잘 만난 것 같다.


내내 감사하며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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