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당신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줄 신개념 독서대행 써-비스
찌는 듯 더운 어느 여름 날 저녁, 한 청년이 페테르부르크의 더럽고 악취 풍기는 거리를 걷고 있다. 그는 아름다운 검은 눈에 밤색 머리를 한 보기 드문 미남이지만, 수려한 외모는 민망할 정도로 남루한 차림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한 표정으로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지금 한 노파를 죽이기 위해 살해 현장을 답사하러 가는 길인 것이다.
가난하고 주변머리가 없긴 해도 선량한 대학생이던 라스콜리니코프가 이런 무시무시한 결심을 한 것은 약 한 달 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골의 홀어머니가 쥐꼬리 만한 연금을 쪼개서 보내주던 등록금이 끊기고 생활비에 큰 비중을 차지하던 가정교사 일자리마저 잃게 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하나뿐인 여동생이 이별 선물로 사준 금반지를 들고 전당포를 찾아야 했다. 그곳에서 그는 그 노파를 만난다. 자비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데다 고리대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등쳐먹으며 제 잇속 차리기에 바쁜 그 해충 같은 늙은이를. 그녀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소중한 반지를 이리저리 헐뜯으며 무례할 정도로 적은 금액을 제시한다. 당장 현실의 가난에 떠밀려 제대로 항의조차 하지 못한 채 푼돈을 받아들고 나온 주인공은 허기를 때우러 싸구려 음식점에 들어갔고, 그 곳에서 다른 사람들이 전당포 노파를 두고 하는 험담을 엿듣는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그 노파는 엄청난 부자이면서도 절박함에 찾아온 사람들에게 물건 값의 4분의 1밖에 쳐주지 않고, 지나치게 높은 이자를 받아먹으면서 기한이 하루만 지나면 담보물을 가차 없이 팔아 치우는 인간이었다. 그녀가 그나마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것은 언니와 달리 선량하고 정직한 여동생 리자베타의 헌신 덕분이지만, 그 바퀴벌레 같은 노인네는 자신을 돌봐 주는 하나 뿐인 피붙이마저 걸핏하면 때리고 구박하며 못살게 군다는 것이다.
이윽고 식당 사람들의 화제는 노파가 앓고 있는 심각한 폐병과 그녀가 (아마도 조만간) 남길 유산으로 넘어간다. 그들은 구두쇠 할멈이 이미 유언장을 작성했으며, 그 막대한 재산을 동생에게조차 물려주지 않고 고스란히 수도원에 기부할 예정이라는 이야기를 떠든다. “가난한 자들의 피눈물을 뽑아 가며 모은 재산이 고스란히 수도원으로 넘어가다니, 정말 너무하지 않은가. 세상에 정의가 있다면 누군가 그 노파를 죽이고 재산을 필요한 이들에게 도로 나눠줄 텐데.”
직접 겪은 치욕스런 경험과 이웃 사람들의 탄식 섞인 대화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안에 잠들어 있던 어떤 열망에 불을 붙였다. 그로부터 한 달 반이 지난 오늘, 그는 그 열망의 실현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아버지의 유품이자 재산이랄 수 있는 마지막 물건인 은시계를 들고 다시 한 번 전당포를 찾았다. 그는 일부러 꾸며낸 비굴한 태도로 은시계를 저당 잡혀 돈을 빌리고 싶다고 말한 뒤, 노파의 움직임을 좇으며 돈을 넣어두는 상자의 위치를 확인한다. 그녀는 늘 그렇듯 퉁명스러웠지만,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은 채 그에게서 은시계를 낚아채고 푼돈을 내어준다. 외부로부터 고립된 전당포의 구조와 폐병 걸린 노인의 허약한 체력을 감안할 때 그녀에게서 목숨과 재산을 빼앗는 일은 어려울 것이 없어 보였다. 이제 주인공에게 남은 문제는 단 하나,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며 정의를 실현할 결단을 내리는 것뿐이다.
하지만 사람을 죽인다는 결단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답사를 마친 그는 술이라도 마시며 떨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동네의 허름한 술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는다.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파묻혀 상념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던 그의 눈에 자신만큼이나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한 남자의 모습이 들어온다. 이윽고 그는 상대방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다. 차림새만 놓고 보면 술집에 가득한 노동자들과 다를 것이 없지만 어딘지 모르게 ‘배운 사람’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알아보고, 자연스레 대화를 시작한다(정확히 말하자면 상대방이 수다를 떨고 라스콜리니코프가 들어주는 식이었지만). 살인을 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선 젊은이는 이 낯선 사내와의 우연한 대화를 통해 그의 인생을 바꿀 운명의 여인, 소냐의 존재를 알게 된다.
처음 보는 이에게 고해성사라도 하듯 쏟아내는 고백들을 통해, 주인공은 상대방의 이름이 마르멜라도프이며 지금은 거렁뱅이 신세이나 한때는 9등 관리로 관청에서 일했고, 명문가 출신의 아내와 네 아이를 거느린 가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예고 없는 인원 감축으로 생계 수단을 잃은 전직 관리(이자 현직 알코올 중독자)가 털어놓는 가족의 상황은 비참하기만 하다. 가장인 본인은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한 번 빠져든 술의 마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극도의 생활고 속에서 가사노동을 하던 아내는 겨울에 목에 두를 목도리가 없어 폐병에까지 걸린 마당에 유복했던 지난날의 허영심을 버리지 못한다. 무책임한 아버지와 히스테릭한 어머니, 그 밑에서 학대와 영양실조에 그대로 노출된 아이들. 이 절망의 구렁텅이에 한 줄기 빛이 되어준 것이 바로 첫째 딸 소냐였다.
마르멜라도프는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소냐에 대해 털어놓는다. 묵묵히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부모님을 지켜보던 그녀가 어느 날 밤 말없이 집을 나가더니 몇 시간 후 30루블이라는 큰 돈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그 날부터 그녀는 창부들이 지니는 노란색 표지를 달고 다녀야 했고, 불결한 여자와 한 지붕 아래 살 수 없다는 집주인의 성화에 쫓겨나 동네 어귀의 초라한 셋방에서 혼자 살게 되었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부모를 원망한 적이 없으며, 이따금씩 남들 눈에 띄지 않는 늦은 시간에 조용히 찾아와 생활비를 놓고 갈 뿐이라고. 그런데 쓰레기 같은 자신은 괴로움을 잊는다는 돼먹지 않은 핑계를 대며 딸이 몸을 팔아 벌어다 준 돈으로 이렇게 술을 퍼마시고 있다고.
상대방의 말을 이해할 수도, 불편함을 감출 수 없었지만, 라스콜리니코프는 어디엔가 홀린 듯 소냐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다. 그리고 도저히 집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마르멜라도프를 다독여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그곳에서 그 가정의 비극적인 생활을 실제로 목격한 뒤 복잡한 마음을 안고 자신의 하숙방으로 돌아온다.
다음날 도착한 어머니의 편지는 그의 마음을 한층 어지럽힌다. 아들에게 전하는 그리움과 안부 인사를 제외하면 편지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첫째, 부잣집에서 가정교사로 일하던 여동생 두냐가 집주인과의 불륜 스캔들에 휘말려 명예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사실은 호색한으로 소문난 집주인이 아름다운 동생의 외모에 끌려 추근댔던 것뿐이고, 증거물인 편지와 하인들의 증언이 나온 덕분에 어렵지 않게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둘째, 죄 없는 가정교사를 부정한 여자로 몰아붙인 것이 미안했던지, 그 집 안주인이 동생에게 좋은 혼처를 소개했다. 상대는 루쥔이라는 이름의 7등 관리인데, ‘약간 거만해보이긴 하지만’ 능력과 재력을 모두 갖춘 좋은 사람이며, 지참금을 가져갈 수 없는 동생의 상황도 너그러이 이해하며 결혼을 승낙했다고 했다. 아니, 그는 오히려 ‘가난한 집 출신 여자는 평생 남편을 순종적으로 섬길 것이므로’ 지참금이 없는 편이 더 좋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루쥔이 사업차 곧 페테르부르크에 방문할 예정이니 꼭 만나서 친분을 쌓으라고 당부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메시지가 지닌 의미는 명확했다. 무능한 큰오빠가 대학에 다닌답시고 돈을 갉아먹고 있는 사이, 동생이 제 몸을 던져 집안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다. 착한 두냐의 머릿속에는 부유한 관리 나부랭이에게 시집을 가서 어머니를 부양하고 오빠의 취직자리를 주선하려는 생각이 들어있을 게 뻔했다. 결혼 상대자가 편지 몇 줄만으로도 분명히 드러나는 오만한 냉혈한이라는 사실은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편지를 통해 전해진 동생의 결심을 (실제로는 본 적도 없는) 소냐라는 소녀와 겹쳐서 생각한다. 그리고 깊은 무력감을 이기지 못한 채 집을 나서서 정처 없이 거리를 걷는다.
그는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는 두 여인을 생각하고, 죽어 마땅한 노파의 살해 계획을 생각한다. 가끔씩은 쏟아지는 생각에 매몰되어 꿈인지 환상인지 모를 몽상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그는 저도 모르게 평소에 잘 다니지 않는 길로 접어든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신의 계시라고밖에 할 수 없는 우연과 맞닥뜨린다. 리자베타가, 전당포 노파의 여동생이자 유일한 동거인인 그녀가, 길거리에서 다른 사람과 ‘내일 오후 7시에 만날 약속’을 잡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 것이다.
이제 주인공은 살해 대상이 고립된 장소에 혼자 있을 날짜와 시간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다음날, 라스콜리니코프는 마치 자신을 시험이라도 하듯 살인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어쨌든 한 달 이상 생각하고 또 생각한 일이니만큼 거칠 것은 없었다. 그는 하숙집 문지기의 집에서 도끼를 훔쳐내 옷 속에 감추고, 한달음에 전당포로 달려가 예상대로 혼자 있던 희생자에게 기계적으로 도끼를 휘두른다. 그런 뒤에는 피로 가득한 웅덩이를 지나쳐 그녀의 지갑과 금붙이들을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하지만 불안을 억누르며 트렁크를 뒤지던 그의 손놀림은 그다지 오래 가지 못한다. 분명히 오늘 7시에 집을 비우기로 되어 있던 리자베타가 예고도 없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목격자를 제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언니의 시신과 살인자의 얼굴을 확인한 리자베타는 그 자리에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굳어버렸고, 라스콜리니코프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도끼를 들고 가련한 중년 여인의 관자놀이를 완전히 부숴버렸다. 예상치도 못한 죄를 추가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부엌에서 피 묻은 손과 도끼를 씻으며 정신을 놓지 않으려 애쓰는 것뿐이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더 복잡하게 돌아간다. 노파와 정기적으로 거래를 하던 상인이 하필 그 시점에 전당포를 방문하고, 문이 안에서 잠겼는데 인기척이 없다는 사실을 수상하게 여기며 소리를 치기 시작한 것이다.
주인공이 아무에게도 붙잡히지 않고 건물을 빠져나온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그는 상인이 문지기를 부르러 간 사이 잽싸게 그 집에서 나왔고, 예상보다 빨리 돌아온 그들과 계단에서 마주칠 뻔했지만 때마침 공사 중이라 열려 있던 빈집에 가까스로 몸을 숨겨 가며 겨우 사건 현장을 벗어난다.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되뇌었지만 몸과 마음은 이미 불안과 공포, 죄의식을 가누지 못해 미친 듯이 휘청거린다. 모든 힘을 끌어 모아 하숙방으로 돌아온 그는 훔친 돈과 물건들을 찢어진 벽지 사이에 숨겨놓고 그대로 기절하듯 쓰러진다.
그는 밤새 악몽에 시달리다가 이튿날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뜨고, 두려움에 떨며 벽지 속에 숨겨두었던 장물들을 꺼내서 동네 빈터의 돌 밑에 묻어버린다. 그 순간부터 그는 마치 온전한 정신의 일부를 시체가 뒹구는 전당포에 놓고 온 사람처럼 불안정한 상태를 보인다. 물론 사람을 죽인 직후에 혼란을 느끼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겠느냐 만은, 마치 정신분열증 환자처럼 매 순간 극단을 오가는 그의 의식을 좇고 있자면 이 살인의 목적과 의미조차 점점 불분명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때로는 그 노파가 죽어 마땅한 인간이었다며 자기합리화를 하다가도 이내 무거운 죄책감에 빠져들고, 또 다음 순간에는 스스로의 나약함을 정신없이 비난한다. 바로 이 부분이 《죄와 벌》을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작품으로 만드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이 전지적 작가 시점의 소설은 주인공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만, 그 ‘있는 그대로의’ 내면이 너무나 정신없이 바뀌는 통에 그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등의 기본적인 내용조차 따라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작가는 딱 이 무렵에 라주미힌이라는 우직하고 올곧은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독자들에게 정상적인 판단의 기준을 제공하는 일말의 친절을 베푼다. 극도의 불안 증세에 시달리던 주인공이 무언가에 이끌리듯 이 밝은 친구를 찾아가도록 자연스레 유도한 것이다. 유달리 쾌활하고 시원스런, 단순할 만큼 선량한 청년인 라주미힌은 걸핏하면 정신을 잃고, 자꾸만 헛소리를 해대는 친구의 상태에서 불길한 기운을 감지한 순간부터 그를 걱정하며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지킨다.
하지만 라스콜리니코프의 불안 증세는 충실한 친구의 간호에도 불구하고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살인 사건과 아무 상관없는 용건으로 방문한 경찰서에서 갑자기 졸도를 하거나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사건 현장에 다시 방문하는 등 온갖 수상한 행동을 해가며 제 손으로 살해 혐의를 점점 짙게 만들고 있었다는 점이다.
하필 이 시점에 그를 찾아온 것이 루쥔의 실수였다면 실수였는지도 모르겠다.
가뜩이나 불안에 떨던 라스콜리니코프는 라주미힌의 입을 통해 죄 없는 사람이 전당포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는다. 한 페인트공이 술값 대신 금귀걸이를 맡기고 술을 마셨는데, 초라한 노동자가 고가의 금붙이를 갖고 있는 것을 수상히 여긴 술집 주인이 이를 경찰에 신고했고, 조사 끝에 그 보석의 주인이 살해된 노파라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귀걸이를 ‘그냥 주웠다’며 얼버무리는 페인트공의 태도는 누가 봐도 수상했고, 결국 그는 그 자리에서 용의자 신분으로 체포되었다고 했다. 편지로만 접했던 여동생의 오만한 약혼자가 불쑥 찾아온 것은, 주인공이 가련한 페인트공을 떠올리며 격렬한 죄의식과 혼란에 사로잡혀 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친구가 전해준 소식에 마음이 심란한 데다 앞선 어머니의 편지를 통해 루쥔이 얼마나 재수 없는 인간인지 익히 짐작하고 있었던 라스콜리니코프는 그의 방문을 전혀 달갑지 않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정작 약혼녀를 가난에서 ‘구원’해주었다는 우월감에 사로잡힌 루쥔은 예비 매제가 자신에게 굽실거리며 감사를 표시할 거라는 기대에 빠져 있었다. 한쪽은 상대방을 경멸하고 한쪽은 무시하는 입장에서 진행된 대화가 어떤 식으로 진행될 지는 굳이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라주미힌의 애타는 중재 노력에도 격렬한 언쟁을 벌였고, 결국에는 방 주인이 욕설을 퍼붓고 손님이 문을 쾅 닫고 나가는 지극히 당연한 결말로 나아갔다.
주인공은 당황한 친구마저 내버려두고 집을 뛰쳐나온 뒤, 마음이 어지러울 때 늘 그렇듯 하숙집을 빠져나가 정처 없이 걷기 시작한다. 익숙한 거리를 걷다가 낯선 술집에 들르기도 하고, 저도 모르게 범행 장소를 찾아가기도 하면서 오만 가지 상념을 하던 그는 문득 거리 한 가운데서 웅성웅성 떠드는 군중을 발견하고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사람들이 모여든 이유는 마차 사고 때문이었다. 한 취객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대다가 달리는 마차 밑에 깔리고 만 것이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마부와 선뜻 나서는 이 없이 수군거리기만 하는 구경꾼들을 헤치고 희생자에게 다가간 라스콜리니코프는 순간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움찔한다. 부서진 가슴께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로 엉망이 되어 있었지만, 그는 분명 살인사건 전날 술집에서 우연히 만났던 전직 관리이자 가련한 창부 소냐의 아버지 마르멜라도프였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급히 사람들을 지휘하여 아직 희미하게 숨이 붙은 그를 집으로 옮기고 의사를 부른다. 하지만 이미 뼈가 부서지고 과다출혈을 일으킨 환자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가족들은 갑작스런 사고 소식을 접하고 패닉에 빠지지만, 의사의 단호한 진단에 결국 가장이 살아날 수 없으리란 사실을 받아들인다. 얼마 후 신부님이 불려오고, 뒤이어 창부 일을 하느라 따로 나가 살던 큰딸 소냐가 경악한 표정으로 달려온다. 눈에 띄게 야한 옷차림과 화려한 화장은 한 눈에 그녀가 무슨 일을 하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마르멜라도프와 생전에 나눈 대화 때문일까? 주인공은 처음 만난 그 거리의 여자에게서 왠지 주변 사람들과 다른 특별한 분위기를 느낀다.
소냐의 창백한 얼굴에는 순수한 슬픔이 깃들어 있다. 죽어가는 남편을 지켜보면서도 돈타령을 하는 부인과 그녀를 위로하면서도 은근한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는 이웃들. 속물근성으로 가득한 그 장소에서 오직 희생자를 위해 슬퍼하고 기도하는 이는 소냐뿐이다. 바로 그 아버지 때문에 본인이 거리로 내몰렸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이윽고 마르멜라도프는 “소냐, 나를 용서해다오!”라는 외마디 외침과 함께 숨을 거둔다. 그 모습을 지켜본 라스콜리니코프는 저도 모르게 주머니를 뒤져, 얼마 전 어머니가 힘들게 마련해서 부쳐준 생활비를 몽땅 털어 망자의 부인 손에 쥐어준 뒤 그 집을 나온다.
비참한 죽음을 목격하고 문득 혼자 있기가 두려워졌는지, 그는 곧장 하숙방으로 돌아가는 대신 라주미힌이 사는 곳으로 발길을 옮긴다. 라주미힌은 자신을 두고 가버린 친구를 책망하기는커녕 다정한 대화를 건네고, 괴로워하는 그를 집까지 바래다준다고 제안하기까지 한다. 두 사람은 그렇게 주인공의 하숙방으로 향한다. 그리고 평소 같으면 당연히 싸늘하게 비어 있을 그 초라한 방에 불이 환히 밝혀져 있고, 뜻밖의 두 손님이 방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사랑하는 가족 라스콜리니코프와 곧 가족이 될 루쥔을 만나기 위해, 어머니와 여동생 두냐가 먼 길을 거쳐 페테르부르크로 찾아온 것이다.
오랜 생이별 끝에 겨우 재회한 가족은 반가움에 서로를 얼싸안는다. 하지만 기쁨의 순간도 잠시, 세 사람은 곧 말 못할 고민을 떠올리며 어두운 얼굴로 돌아간다. 그들의 침통한 표정에는 각기 다른 사정이 있다. 우선, 두냐와 어머니는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루쥔을 통해 예비 매제와의 싸움 소식을 전해들은 뒤 내내 걱정에 빠져 있었다. 한편 라스콜리니코프는 두냐가 못난 오빠 때문에 그런 끔찍한 놈에게 시집을 간다는 사실이 괴롭고, 무엇보다 사람을 죽인 자신의 불안한 처지가 신경 쓰여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조심스레 서로의 마음을 떠보던 그들의 대화는 결국 말다툼으로 번졌고, 라스콜리니코프는 동생의 결혼을 강하게 반대하며 힘들게 올라온 두 사람을 매정하게 숙소로 돌려보낸다.
예상치 못한 주인공의 냉대에 모녀는 깊은 상처를 입는다. 이때 해결사 역할을 자처한 것은 우연히 그 자리에 끼어 있던 선량하고 재치 있는 청년 라주미힌이었다. 그는 실의에 빠진 두 여인을 달래며 직접 숙소까지 모셔다 준 뒤, 지금 라스콜리니코프가 병을 앓느라 제정신이 아니라는 설명과 함께 본인이 그를 성실히 돌보며 최대한 자주 경과를 보고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기댈 곳 하나 없는 타지에서(루쥔이 별로 기댈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그녀들도 잘 알고 있었다) 예기치 않게 만난 은인의 손길은 애처로운 두 여인의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그 순간부터 그녀들은 이 믿음직한 청년에게 마음을 열고, 실제로 의식한 것보다도 더욱 깊이 의지하게 된다.
천성이 선한 데다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이 갸륵한 라주미힌이었지만, 사실 그가 일면식도 없는 여인들에게 이렇게까지 적극적인 호의를 베푼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할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죄와 벌》 본문에 소개된 두냐의 외모를 있는 그대로 옮겨놓는 편이 훨씬 효율적일 것 같다.
“두냐는 호리호리하고 놀랄 만큼 균형 잡힌 몸매를 지닌, 뛰어나게 아름다운 여자였다.”
(<죄와 벌>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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