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을 다섯 가지 종류로 분류하곤 했다” 숙명여대 국문학과 교수 김응교의 말이다. 그는 이와 같은 선언적 고백을 한 후, 각각의 책들이 어떤 것인지, 그 속성들을 소개하고 있다. 첫째는 쓰레기이다. 둘째는 서점에서 서서 보거나 도서관에서 빌려 보면 되는 책이다. 셋째는 사둬야 할 책이다. 넷째는 비닐로 싸 둬야 할 책, 선물해야 할 책이다. 이것들은 1달, 아니 1년이 걸려 읽어도 부족함이 없을 책들이다. 다섯째는 나 스스로가 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마지막은 지나치게 독백적이고, 형이상학적이기에 여기서는 다루지 않기로 하자. 그렇다. 책에도 옳고 그름이 존재한다. 물론 이는 나에게 해당되는 실존적인 말이기도 하고,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도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책에는 분명 좋은 책과 나쁜 책이 있다.
그래 좋다. 좋은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알겠다. 그런데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이제 우리는 ‘읽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 있다. 이반 일리치는 수도원의 방식을 토대로 하나의 ‘읽기론’을 주창했는데, 거기서 그는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책은 음식이다. 공부를 통해 부소고 씹어서 양분을 얻어라“. 이는 곧, 읽기란 몸의 행위임을 말하고 있다. 그것도 온몸을 통해 향유해야 하는 전인격적인 운동 말이다.
공부는 무술 쿵푸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이 말의 한자어인 ‘工夫’는 육체적인 행위인 ‘쿵푸’에서 유래한 말이다. 때문에 몸을 쓰지 않는 공부란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움직임을 통해 무술을 내 몸에 각인시키듯이, 끊임없는 육체적 행위를 통해 사유를 내 몸의 각인시키는 하나의 몸짓이다. 그래서 그랬던가. 다산은 제자들에게 공부를 논할 때, 꿇어않음의 미학을 전하고 있다. 그는 “꿇어야만 학문을 논할 수 있는가?”라는 세간의 논조들을 반박하며 “꿇어앉은 자세를 풀면 속마음의 경건함도 해이해지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수많은 서신 속에서 그는 공부 안에 슬퍼하는 법, 술을 마시는 법 등 실천의 공부론을 제자들에게 주지 시키고 있다.
실학자인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온 편지'는 그의 읽기론이 잘 드러난 책이다.
따라서 읽기란 몸의 행위를 수반하기에 언제나 정치적이다. 중립의 읽기란 없다. 무당파야 말로 가장 당파적이다(레닌). 몸의 읽기란 세상과 대면하는 나의 태도를 형성하고, 인식의 틀을 제공한다. 그러니 이제 몸의 읽기를 수행하자. 눈이 아니라 소리 내어 읽고, 옮겨 적어 보자. 그리고 세상에 내 정치성을 드러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