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잊지 못할 그날..
때는 어언 3년 반 전. 나는 그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니, 잊지 않으려 한다. 하늘은 유난히도 파랗고, 아무렇게나 사진을 찍어도 곧 화보가 되는 도시, 파리. 나는 그렇게 파리에 와 있었다. 내 생에 파리에 살아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는데, 결혼하고 애까지 데리고 파리에 와서 살게 될 줄이야. 파리라는 곳은 낭만이 가득한 에펠탑의 도시라고만 알았던 내게 그 환상이 와장창 깨지는데 한 달이 채 안 걸렸다. 신랑 주재원 발령으로 함께 온 이곳에서 3년간 살아야 하는 나는 우선 귀중품만 직접 소지하고 나머지는 모두 선박 이사로 보냈다. 짐이 도착하는 한 달 정도의 시간 동안 호텔에 묵어야 했다. 회사에서 지정해준 몽후쥬(Monrouge)라는 동네에 있는 아다지오(Adagio) 호텔에서 묵었다. 한 달간 이 좁은 호텔방에서 사람 3명이 살아야 했다. 한 명은 갓 돌이 지난 아기다. 이유식을 만들어 먹여야 하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다. 게다가 아이는 온갖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직립 보행의 기쁨을 맛본 터라 어디든 아장아장 걷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다. 그렇다고 밖에 나갈 수도 없는 게 파리의 7월은 너무나도 더웠다. 지리도 모르고 불어 무식자인 나는 혼자도 겁나는데 돌쟁이 아이를 데리고 나가기는 더욱 겁이 났다. 근처 모노프리(Monoprix) 마트에서 이유식 장을 봐서 하루하루 아이를 먹였다. 너무 답답한 날에는 그 좁은 호텔 로비라도 어디냐며 소파 위에서 숨통을 조금 트였다.
그러던 어느 날 호텔 로비 담당 직원이 아이에게 관심을 보였다. 직원은 흑인 여성 1명과 이슬람계 남성 1명이었다. 하루 중 로비에 마실 나오는 것이 그나마 하루의 소소한 일탈이 된 나와 아기는 호텔 로비를 어느덧 편안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3주가 흘렀고, 우리 가족은 다 같이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 신랑은 회사 출근에 집을 알아보러 다니느라 너무 바빴기에 오랜만에 가족 나들이는 나의 기분을 한층 들뜨게 만들었다. 평소에는 늘 검은색 바지에 면티셔츠를 입고 다녔던 나는 그날따라 외출할 일이 있을까 봐 외출용 드레스로 짐 꾸러미에 손수 싼 화이트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었다. 우리 가족은 자동차를 타고 베르사유 궁전으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푸르른 녹음과 파란 하늘이 내 눈과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베르사유 궁전 곳곳에서 아이 화보 촬영하듯 사진기 셔터를 무수히 눌러댔다. 행복이란 바다에 퐁당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나를 발견했다. 호텔방을 나온 지 3시간이 흘렀을까.. 아기가 어리기 때문에 밖에 오래 머무는 것이 힘들어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서자 내뱉은 신랑의 첫마디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 아무리 아이 키우느라 청소 안 하고 지낸다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노트북은 책상 위에 있지 않았어? 루이뷔통 백은 옷장 안에 넣었어? 분명 밖에 있는 걸 봤는데?"
이상하다. 뭔가 이상하다. 다른 건 몰라도 루이뷔통 백은 침대 옆에 놔두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편지지를 이렇게 다 펼쳐놓는 게 어딨어?"
나는 편지지 얘기까지 듣고서야 사태 파악이 되었다. 편지지는 캐리어 안에 둔 또 다른 명품백 안에 고이 넣어 둔 것인데, 이것이 바닥에 있다는 것은 누군가 내 가방을 만졌다는 말이다. 그렇고 보니 귀중품은 다 없어졌다. 시계, 노트북, 명품백 2개, 현금.. 총 1000만 원 치를 도난당했다. 순간 너무 무서워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이 명품백을 5번도 채 들지 않았다. 결혼할 때 시어머니께서 사주신 내 인생 첫 명품백이라 애지중지했다.
로비로 가서 사태를 설명한 뒤, 경찰을 불러달라고 말했다. 시계는 저녁 7시쯤 되었을까... 경찰은 오지 않았고, 직원들의 태도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국 같으면 직원들과 경찰들이 왔을 텐데 프랑스는 달랐다. 그들은 내일까지 기다려야 한다며 다른 방으로 옮길 것을 허락했다. 옮긴 방에서 잠이 올리 만무했다. 공포에 떨며 밤을 지새우고, 날이 밝자 경찰을 찾아갔다. 불어를 하나도 모르는 우리 가족이기에 회사 에이전시 직원 한 명을 대동해서 갔다. 경위서를 작성한 후, 우리더러 일단 있어보라고 했다. 그 후 경찰들이 왔지만 대충 훑어보고 갔다. 지문을 알 수 없단다. 다음날, 카드 보안 관련 전문 기술자가 와서 문을 확인해 보니 그 시간에 출입의 흔적이 없다고 했다. 이것은 전문가의 손길이 틀림없다. 마스터 키의 흔적까지 없다는 것은 그야말로 이런 상황까지 미리 다 계산해서 움직인 것이다.
호텔은 파리 경계의 끝에 있었다. 주변 분위가 썩 좋지는 않았다. 나는 짐작 가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호텔 로비 남자 직원이 늘 이상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나들이 가던 그날에도 그 남자 직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 남자 직원이 의심되자만 물증이 없었다. 이렇게 발을 동동 구르고만 있는 상황에서 우리를 더욱 어처구니없게 만드는 것은 바로 프랑스 경찰과 호텔 측 의 태도였다. 호텔은 이 일에 관련이 없다며 선을 딱 그었고, 경찰 또한 일을 크게 관여하거나 조사하려 들지 않았다. 손님인 우리가 조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 후 프랑스 도난 사건에 대해 대사관, 블로그, 카페 등에서 엄청나게 알아보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호텔 도난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그냥 돌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사관에 전화했는데, 이런 일이 하루에도 몇십 건씩 일어나니 스스로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만 할 뿐이었다. 알면 알수록 파리 도난 사건 이야기는 무궁무진했다.
파리에서 소매치기, 절도, 도난은 부지기수라는 것을 알고서 앞으로 3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눈 앞이 캄캄했다. 우선 마음을 가다듬고 회사에 호텔을 옮겨달라고 요청했고, 에펠탑이 바로 보이는 파리 중심가의 노보텔에서 2주간 머물게 되었다. 파리 15구에 위치한 노보텔은 바로 앞에 에펠탑이 보이고, 근처에 보그흐넬(Beaugrenelle)이라는 큰 쇼핑몰도 있는 매우 번화한 동네였다. 아이를 동반한 호텔 생활은 어느 호텔이든 다 힘이 들지만 그래도 호텔 급이 조금 더 높아져서 쾌적했고, 근처 한인 마트가 있어서 이유식 하기 편리했다. 보그흐넬 쇼핑몰을 돌아다니다 보니 소매치기가 곳곳에 있음을 발견했다. 그런 일을 당하다 보니 소매치기 행동들만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2주간 Orange 통신사에 가서 Homiris라는 세콤을 설치를 신청했다. 그리고 Darty 전자 제품 마트에서 Nest라는 cctv를 구매했다. 집을 계약한 뒤, 이 모든 것을 서둘러 설치했다. 물론 프랑스답게 원하는 날짜에 빨리되지 않았고, 시간이 꽤 걸렸다. 속 터지는 일이 앞으로 많겠구나를 알리는 신호였다. 하루 빨리 내 집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노보텔도 결코 안전하지 않을 거라는 불안감에 늘 주변을 살피고 경계하는 습관이 생겼다.
사건이 발생한 아다지오 호텔 본사에서도, 호텔 소속 보험회사에서도, 신랑 회사에서도, 아무도 우리에게 보상을 해주지 않으려 했다. 단지 본사 윗사람에게서 Tattinger 샴페인과 위로의 카드 한 장이 호텔에 도착했다. 우리는 보상을 받을 때 까는 절대 이 샴페인을 터트리지 않기로 했다. 신랑은 추후 이 사건 처리에 대해 끝까지 파고들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길고 긴 싸움으로 근 1년이 지나서야 보험금을 받을 수 있었다. 프랑스란 나라 자체가 행정 절차가 너무 길어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린 것도 있다. 보험금을 다행히 받았지만, 마음의 후유증은 꽤나 오래갔다.
파리에서 살아보는 첫 스타트부터 이런 엄청난 일을 겪게 되니 이곳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아기가 있다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강했다. 혼자 아기 키우기도 힘든데 이런 소매치기가 가득한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가나 한숨부터 나왔다. 그래도 이왕 온 것 힘을 내야 했다. 나는 엄마이니까 강해져야 했다. 외출할 때면 늘 5개 되는 창문을 다 닫고, 볼레라고 불리는 단단한 나무의 셔터도 수동으로 모조리 내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창문으로 도둑이 들어올 것만 같았다. 아기 키우는 엄마라면 알다시피, 어린 아기가 있는데 집단속만 30분 걸리는 이 작업이 결코 쉽지 않다. 시시티브이 켜고, 창문 닫고, 손으로 돌려서 내리는 수동 셔터를 내리고(힘은 또 엄청 든다), 세콤 켜고, 이 모든 작업을 마치고 나면 외출하기도 전에 진이 빠진다. 그렇고나서 외출을 하면 마음은 매우 쪼그라들어서 주변을 늘 경계하며 다녔다. 게다가 유모차에는 아기가 울어댔다. 애 보랴 주변 살피랴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방은 늘 크로스로 배에 딱 붙여 다니고, 소매치기에 대비해 늘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1년간을 불안한 마음으로 살았다. 3년 반이 지난 아직도 늘 조심하고 경계하고 다닌다. 그때 사건은 내게 엄청난 후유증을 남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파리 입성 신고식은 제대로 치렀던 것 같다.